조선왕조 500년
제 23 권 [명성 황후]
1863년 철종의 사후, 고종의 즉위와 함께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서게 된다. 흥선군 이하응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생존하는 대원군(왕의 아버지)의 지위에 올라 흥선 대원군이라 불리게 된다. 수렴청정에 나선 신정왕후는 곧바로 흥선 대원군에게 일임을 하겠노라 천명을 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70년 가까운 세월동안 누려왔던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가 종말을 고하게 됨을 의미한다.
김좌근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문의 정치 세력은 절대 무시할 수가 없어 신정왕후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그들을 부분적으로 중용하며 정치적 타합을 이루고자 한다.
흥선 대원군이 왕권을 잡은 이후 맨 먼저 시도한 개혁은 바로 서원의 철폐였다.
서원書院.
서원이란 원래 내외의 명현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양성하는 사설 교육 기관이다. 그 유래는 중국의 당나라에서부터 비롯되었으나,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서원으로는 중종 때에 주세붕이 순흥에 세운 백운동서원을 최초로 친다. 명종은 이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액額을 하사하고 책과 노비, 토지를 내려주었다. 그 후 전국 각지에는 우후죽순처럼 서원이 늘어만 가고, 더불어 많은 폐단을 불러 일으켰다. 서원에 소속된 토지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으므로 국고를 궁핍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서원에 소속된 사람에게는 군역을 면제해주었기에 많은 양민들이 원노院奴를 자청하기도 했다. 또한 유생들은 서원끼리 붕당을 지어 대립할 뿐 아니라 양민을 상대로 토색질을 자행하는 지경에 이르러 때로는 관아의 위세를 넘어서는 무법천지로 변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청주의 화양동서원의 횡포가 극심했는데, 송시열의 유지로 건립된 만동묘萬東廟로서, 자의로 발행하는 화양묵패華陽墨牌라는 것이 있었는데, 서원에 필요한 재원을 모월 모일까지 봉납하라는 고지서에 묵인이 찍혔다 하여 화양묵패라 한다. 이것을 받은 사람들은 논밭을 팔아서라도 봉납에 응해야 하며, 이를 거역하면 서원에 잡혀가서 공갈, 협박을 당하고 심하면 곤장을 맞기까지 했다고 한다.
대원군은 650개의 난립해 있는 서원 중 47곳의 사액서원(賜額書院: 왕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은 서원)을 남겨두고 모두 철폐하는 명령을 내린다. 유림과 사대부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 한 것이었다. 지방 곳곳에서 올라온 유생들이 창덕궁 앞에 진을 치는 등 소란이 있었지만, 병사들을 동원하여 강경 진압을 하기에 이른다. 허나, 대원군의 일성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너희가 글을 읽었으면 알리라. 죄 없는 백성들의 가산을 약탈하고, 그들을 매질해도 좋다는 구절이 공맹의 가르침에 있더냐? 있다면 어느 구절인지 소리 내 외쳐보렸다. 또 세금을 포탈하고 병역을 기피하며 묵패를 발행하여 사욕을 일삼는 것을 어디에서 배웠느냐, 그것이 대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음이더냐. 서원이 선현의 가르침을 본받는 곳이거늘, 너희가 섬기는 선현들이 그렇게 가르쳤거든 그 전거를 말해보아라, 어느 서책에 그런 구절이 적혀 있더냐!”
비록 서원의 철폐를 위한 강경한 조치로 동방의 진시황이라는 비난을 유림으로부터 받지만, 대다수 백성들은 뜨겁게 환호했던 결단이었다.
다음으로 대원군이 취한 행보는 세도정치로 무너져 버린 왕실의 존엄을 되찾는 일이었다. 즉 300년 가까이 방치되어 온 경복궁의 중건이었다.
당시 국가 재정 상태로는 도저히 진행할 수 없는 역사役事임이 분명한데도, 이를 감행한 이유는 바로 왕실의 위엄을 보임으로써 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단합을 도모한다는 명분이었다.
재정 마련을 위하여 대원군은 안동 김문으로부터 30만냥이라는 헌납을 끌어내는 한편, 왕실의 종친들과 사대부와 유림, 심지어 백성들로부터 원납전願納錢이라 일컫는 재원을 만들고자 한다. 원납전은 문자 그대로 백성들이 원해서 자진 헌납하는 기금이었으나, 8월로 접어 흉년이 들고 백성들의 살림이 궁핍해지자 이는 갈수록 강제징수의 성격을 띠게 된다. 후에는 원한에 사무치는 돈이라 하여 원납전怨納錢이라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경복궁 중건은 도중에 발생한 대화재로 말미암아 다시 공사를 시작해야 하는 불운을 겪었고, 이에 따른 목재와 재화를 마련하느라 유림과 사대부 묘당에서 벌목을 하게 되고 이에 따라 대원군은 유림과 또 다른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당백전當百錢이라는 화폐를 발행하여 중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코자 하였는데, 당백전의 주화에 새겨진 글자는 '호대당백(戶大當百)'으로, 풀이하면 "이 화폐는 호조(戶曹)에서 주조한 고액화폐이며, 일반 동전의 100배에 해당한다."라는 의미이다(액면가가 100배에 달한 반면 실제 구리의 함량은 당대 상평통보의 6-8배에 불과하여 가치가 매우 나쁜 악화(惡貨)에 해당했다. 실제 대금거래를 대체하게 된 반면에 실물경제에서는 초인플레이션이 나타나는 등의 극심한 혼란이 초래되었고, 결국 1868년 10월, 발행 2년만에 폐지되었다). 경복궁 중건에 따른 부작용은 대원군의 집권 내낸 그의 발목을 잡았고 후에는 결국 대원군의 실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한편, 왕실에서는 중전 간택을 위한 시기가 다가온다. 그간 외척으로 인한 시달림에 이력이 난 대원군으로서는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수소문 끝에 찾아낸 인물이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조카뻘 되는 규수를 찾아낸다. 조실부모하고 가계가 몹시 궁핍한 집안의 처자였다. 대원군은 오히려 외척의 발호가 없을 것이라는 점이 맘에 들었든지 민씨를 내심 점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녀가 바로 명성황후이자 중전 민비가 되는데, 우연히도 흥선 대원군의 어머니, 즉 남연군 부인도 민씨요, 아내인 부대부인도 민씨, 그리고 며느리가 될 중전도 여흥 민씨가 된다.
반도국가라고 하는 조선의 지리적 위치는 세계열강으로부터 문호 개방의 압력을 세차게 받아오는데, 특히 고종조에 들어서면서 그 물결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특히 이양선의 잦은 출몰은 민심을 더욱 흉흉하게 만들고, 낯선 서양인과 서양문물은 대다수 조선인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천주교라고 하는 이국적인 종교 그리고 서양 신부들의 전도 활동은 백성들에게 심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안동 김문의 세도가 절정에 달한 철종조에는 천주교의 선교 활동이 거의 방치되었고, 고종의 즉위 초기에 천주교는 질과 양에서 현저한 발전을 이룬다. 조선으로 파견된 프랑스 신부가 12명이고, 천주교도가 2만3000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첫 세례자인 이승훈을 배출한 시기로부터 70년 동안 엄청난 교세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비논리적 전개이기는 하나, 당시의 천주교와 서양 신부라는 존재가 한편으로는 서양 문물을 대변하는 것으로 동일시되기도 하는 시국이었다.
또한 낯선 문물을 배척하고 자신의 고유한 전통 문화를 고수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라고 볼 수 있고, 이런 측면에서 세를 넓혀가는 천주교에 대한 제재는 서양의 이질적 문화를 배격하고자 하는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1866년(고종 3) 병인년.
천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이루어지는데, 그 표면적 이유는 조상의 위폐를 모시거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다는 것, 사내와 계집이 한자리에 어지러이 모일 뿐 아니라. 여자 혼자 있는 규중에 사내 홀로 드나든다는 것, 때로는 사내와 계집이 함께 먼 길을 떠나는 일도 잦다는 것 등이다. 한 마디로 전래되어 오는 미풍양속을 해치며 혹세무민으로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한다는 것이다.
병인교난丙寅敎難이라 불리는 대박해는 고종 8년까지 6년간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러시아의 침입을 막으려는 문제로 일어난 고종 3년의 박해.
2. 불란서 함대의 침입 후에 일어난 고종 3년의 박해.
3. 남연군(대원군의 아버지) 무덤 도굴로 인해 일어난 고종 5년의 박해.
4. 미국 함대의 침입으로 일어난 고종 8년의 박해.
모두가 외세의 침입에 따른 여파로 인하여 발생된 박해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데, 프랑스인 신부 9명과 신도들 약 8,000명 정도가 처형되었다. 신부 중 살아남은 리델 등은 청나라 천진 주재 프랑스 함대 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알렸고, 이로 인해 10월 병인양요의 원인이 된다.
1866년 병인년에는 안팎으로 많은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해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한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라 부르는데, 이는 제너럴 셔먼호의 선원들이 그들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중군 이현익을 감금하는 등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평양성 내의 관민들이 모여 응징한 사건이다. 제너럴 셔먼호는 계속된 비로 대동강 수위가 올라가자 상류로 따라 진입하였다가 강물이 빠지자 모래톱에 선체가 걸려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셔먼호의 승무원들은 불안과 초조에 싸여 총과 대포를 발사하게 되고, 조선인 7명이 죽고 5명이 다치는 인명 피해가 일어난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박규수의 지휘 하에 셔먼호를 불태우고, 생존한 미국 선원을 살려두고자 했으나 흥분한 평양부민들이 삽시간에 모두 때려죽인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서 후에 조선의 개화 운동에 있어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한 인물이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었던 그 해 10월에 프랑스 신부 리델의 안내로 프랑스는 함대를 끌고 조선 연안에 접근한다. 당시 천주교도인 조선인들의 안내를 받아 진행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강화도를 침공하여 점령하기까지 한다. 11월 그들은 퇴각하면서 강화읍을 방화 파괴하고, 외규장각에서 수천 권의 서적, 각종 무기, 국왕의 인장 등을 약탈하였다(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는 2013년 일시적으로 반환되었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하였지만 이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조선의 쇄국 정책을 한층 강화되는 계기가 된다.
외국인 신부가 복수의 화신이 되어 조선을 공략한 또 다른 사례는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소를 도굴한 사건이다.
남연군 도굴 사건은 독일인 오페르트(Oppert,E.J)가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하자 기회를 노리다가, 병인사옥 때 탈출한 프랑스 신부 페롱(Feron) 그리 조선인 천주교도와 함께,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球)의 묘를 발굴해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대원군과 통상 문제를 흥정하고자 하였다.
남연군 묘에는 또 다른 일화가 있는데, 이하응이 흥선군인 시절 집안을 설득하여 거금 1만 냥을 들여 명당자리를 물색한 후, 묘소의 관 주위에 수 만 근의 철을 녹여 부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도굴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남연군 도굴 사건에는 수완이 능란한 오페르트가 한국 정서에 밝은 프랑스 신부 페롱과 담합하고 미국인 젱킨스를 전주錢主로 끌어 들인 3국 합작의 프로젝트였다.
한 나라 최고의사결정자의 아버지 시신을 도굴하여 협상 테이블에 올리려했던 바, 돈과 종교의 전파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제국주의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특히 페롱 신부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 로즈 제독의 함대에도 승선하여 강화도 공략에 일조했던 바가 있다.
그리고 상기 병인양요에 언급된 프랑스의 리델 신부는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5년이 지난 1871년 미국이 동 사건을 트집 잡아 조선에 통상 교역을 압박하고자 할 때에도 조선 공략의 길잡이로서 역할을 한다.
1871년 미국의 강화도 침공을 신미양요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개된 미국과의 전쟁이었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이 지난 직후라서 전투 경험이 많은 숙달된 해병대원을 파견하였기에, 조선 병사는 500명이 전사한 반면 미국은 아주 미미한 피해만을 기록하게 된다. 약 8시간 동안 치러진 전쟁에서 미군의 일방적인 폭격과 도륙이 자행되었으나, 조선 병사들의 몸을 불사르는 항전으로 짧은 시간 동안 진행되었지만 매우 치열했던 격전이었다고 전해진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자결한 조선인 병사가 100 여명에 이르는 등 조선의 항전이 그들의 예상보다 드세고 교섭도 진전이 없어 형국이 장기화될 것으로 판단되자 미국은 조선인 포로를 풀고 스스로 철수하였다.
신미양요는 미군이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결사 항전하여 이양선을 몰아낸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고수하였으며, 여러 차례 통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외교 문서를 거절하는 계기가 된다. 후에 미국은 참전한 9명의 수병과 6명의 해병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였다고 하는데, 미군美軍 역사상 거론하고 싶어 하지 않는 전쟁사라고 한다.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에, 당시 반야만적(半野蠻的)인 군사적 행위로서, 상대는 변변한 현대식 무기조차 보유하고 있지 않은 국가였으며 그를 일방적으로 도륙한 전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 또한 애초에 목적했던 바를 이루지도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는 프랑스 신부에 협조하는 천주교도인 조선인들이 다수 등장하고 그들이 길잡이의 역할을 한다. 이를 보면 연상되는 사건이 있다. 바로 황사영의 백서帛書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몸을 피한 황사영이 토굴에 숨어 청나라에 전달하고자 비단에 적었던 문서를 백서(帛書)라고 하는 것인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은 경제적으로 전혀 힘이 없으니 서양 제국의 동정을 얻어 성교(聖敎, 천주교)를 받들
어 나가고, 백성들의 구제에 필요한 자본을 얻고자 한다.
2. 조선은 2백년 이래 평화가 계속되어 백성은 전쟁을 모르니 조선에 배 수백 척과 강한 병사 5~6만 명으로 대포, 군물들을 싣고 와서 선교의 승인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과 서양 전교대를 조직하여 와서 선교사의 포교를 쉽도록 할 것 등이다.
이를 입수한 노론에서는 사학邪學에 빠져 나라를 외국에 넘기려 했다는 점에서 천주교를 탄압할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천주교(혹은 기독교)가 전도를 구실로 제국주의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것은 의도했든 아니든 충분한 논란거리가 된다는 생각이다.
한편, 일본의 사정은 1854년 미국의 군사 압력에 굴복하여 가나가와조약으로 개항을 한 후, 서양문물의 도입에 미온적 반응을 보이던 도쿠가와 막부가 사카모토 료마를 주축으로 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세력에 굴복하여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 : 막부의 통치 권력을 왕실로 돌려준다는 뜻)을 하게 된다. 이로부터 존왕양이 세력은 양이에서 개화로 눈을 돌려 본격적인 서구 현대화 작업에 착수한다. 소위 메이지 유신의 시작이다.
급속한 현대화는 일본 군사력의 팽창을 가져왔고, 1870대 들어서면서 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는 대정봉환이전부터 일본의 번국(蕃國: 다이묘에 의하여 통치되던 봉건적 자치국가)들은 막부의 눈을 피해 서양(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현대식 무기와 군함, 군사 체계를 도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875년 일본은 운요호를 강화도로 보내 군사적 충돌을 야기하고 육전대를 상륙시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한다. 그리고 1876년 초 조선에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묻고자 군함 5척을 동원하여 조선 조정을 재차 압박한다.
조선 정부에서는 중신회담을 거듭한 끝에, 국제 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조약 체결 교섭에 응하기로 하고, 전권대신(판중추부사 신헌)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조선 ᆞ일본 양국 사이에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을 조인하게 되었다. 조선으로서는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 된다.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맺은 1876년은 대원군이 1873년 실권하여 거의 금족령에 준하는 상태에 있을 시기였기에 그나마 개항을 위한 조약이 체결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당시 조선 국내 정치로 돌아오면, 경복궁 중건에 따른 재정의 탕진은 국가 운영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백성들의 세금에 의존하는 국가가 엄한 곳에 돈을 쓰고 정작 써야할 곳에 예산이 없으니 더욱 더 백성을 쥐어짜게 만든다. 게다가 어설픈 화폐 발행 등으로 국가 경제는 더욱 수렁으로 빠진 상황이 되어 버렸고, 10년간 이어진 대원군의 만기친람에 따른 정책의 부작용으로 전국 곳곳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1873년 어느덧 22세의 나이에 이른 고종은 중전 민비의 간언에 따라, 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선언하기에 이르고, 유림 사이에 명망이 높은 최익현의 탄핵 상소는 흥선 대원군을 하루아침에 실각하게 만드는데, 고종으로서는 대원군이 내세우는 양이, 보국(쇄국)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점도 크게 작용했다.
친정 체제를 선포한 고종은 의정부의 개편을 단행하는데, 개항의 필요성을 누누이 주장해오던 박규수를 우의정으로 기용한다. 이것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읽어 시대의 흐름을 판단하는 당시의 선각자들 간에 크나 큰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박규수를 중심으로 한 유대치, 오경석, 이동인, 김옥균, 김홍집, 박영효 등은 앞으로 시대를 주도하는 주인공이 된다.
고종의 의욕적인 출발은 만동묘(화양동서원)를 복설함과 함께 호포법을 폐지함으로써 유림들의 지지를 얻고, 당백전과 청전의 유통을 금함으로써 백성들의 숨통을 열어주고자 했다. 또한 암행어사의 파견으로 지방 관아의 비리를 척결하는데 주력한다.
후에 명성황후라 부르는 중전 민비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시해되기까지 그의 행적을 살펴볼 기회는 24권에서도 계속될 것이지만, 시아버지인 대원군과의 권력투쟁이 우리나라 근대사에 미치는 영향이 큰 관계로, 둘 사이의 악연이 된 발단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고종이 15세가 되던 해 대원군은 척분이 없는 규수 민씨를 중전으로 간택한다. 이는 당연히 외척의 발호를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고종은 당시 궁인 이씨(상궁이었다고 함)와 사랑에 빠져 있었고, 그렇기에 민비의 몸이 아닌 궁인 이씨로부터 후손을 먼저 보게 된다. 완화군이라 명명하는데, 대원군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게 된다.
1871년 신미양요가 있던 해, 민비는 드디어 원자씨를 생산하게 된다. 그러나 갓 태어난 원자는 대변불통(大便不通: 항문이 완전히 막힌 항문폐쇄증)이라는 희귀한 병을 앓게 된다. 이에 민비는 서양식 의술을 동원해서라도 항문을 뚫어야 한다는 것이고, 대원군은 장차 종사를 이어갈 몸인데 어찌 쇠붙이로 몸에 구멍을 낼 수 있느냐며 맞선다. 결국 산삼을 달인 탕제를 먹이게 되고 원자는 닷새 만에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민비로서는 대원군이 완화군을 총애하고 있으며, 자신의 몸에서 공주가 태어나길 바라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을 한다. 게다가 고종이 친정을 할 나이가 되었고, 중전인 자신의 몸에서 원자까지 태어나게 되면 대원군으로서는 더 이상 섭정을 할 명분이 없어지기에 권력욕이 강한 대원군이 원자에게 독이 되는 줄 알면서도 굳이 탕제를 먹인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원한을 품은 민비는 총명한 머리를 동원하여 여흥 민씨 일가의 파벌을 조성하면서 유림의 최익현으로 하여금 대원군 탄핵 상소를 올리게 한다. 그리고 고종 스스로 친정親政을 선언하도록 유도한다.
제 아무리 왕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성인이 된 왕을 섭정할 권한은 없는 것이고, 왕국에서 왕명을 거역할 신하가 어디에 있겠는가!
비록 비리도 없었고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대원군의 일인지배 체제는 많은 문제에 봉착해 있었으며, 조선으로서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많은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P/S
1. 흥선대원군은 집권하자 문란하였던 환곡(還穀)·전세(田稅)의 개혁과 함께 군정에도 일대 쇄신책을 단행하면서 호포법이 다시 대두되었다. 1871년(고종 8) 3월 종래의 군포를 호포로 개칭하고 균등과세의 원칙 아래 종래 양반들의 면세특전을 폐지하고, 신분계층의 상·하를 막론하고 호당 2냥씩을 부과하였다. 이때 양반들의 위신을 고려하여 양반호에 대하여는 호주명(戶主名)이 아닌 하인의 노명(奴名)으로 납입하도록 했다고 한다. 즉 대원군 집권 시기에는 나름 신분을 떠나 조세 균등의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단단히 하고자 노력하였고, 이 점은 후에 등장하는 중전 민비로 인한 일련의 국고 탕진과 비교가 되는 점이다.
2.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당시 혜안을 가진 인물이었고,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처리했던 인물이다. 당시 그는 제너럴 셔먼호 선박을 수거하여 연구할 계획이었으나 성난 평양군민이 불태워 버린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었다. 그는 신분과 나이 고하를 떠나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들과 깊은 교우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그를 중심으로 유대치, 오경석, 이동인, 김옥균, 김굉집(후에 김홍집), 박영효등 개화사상에 뜻을 둔 인물들이었다.
그 중에서 이동인은 승려 신분으로서 그의 행적은 괴이하다할 정도였으며, 굳이 비교한다면 일본의 사카모토 료마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다 떠나간 인물이다. 그의 대한 간략한 소개를 옮겨 적는다.
“일찍부터 개화된 승려였던 그는 유대치, 오경석 등을 통해 김옥균, 서광범, 윤치호 등의 청년들을 만나 신문물을 전하며 그들과 교류하였다. 1879년 일본불교 부산별원 책임승려인 오쿠무라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밀항하였으며 이후 여러 번 일본을 다녀와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1880년 말에는 고종의 밀사로서 일본에 파견됐다. 귀국 후 서울 도착 즉시 이동인은 국왕으로부터 조선국 금위영 예하 별선군관 직책에 임명되어 자유로이 왕궁을 출입하게 되었다. 이후 통리기무아문(*조선 개화 정책을 전담하는 일종의 테스크 포스)의 참모관으로서 이동인은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보낼 때에도 막후에서 활동하였으며, 총포 등의 무기와 군함을 구입하기 위해 일본과 비밀교섭을 하기도 했다.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시 파견되기 직전 갑자기 의문의 실종을 당하는데 1881년 5월경 한성부에서 암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인의 암살은 개화에 반대하는 수구 세력에 의한 것(대원군?)이거나, 이동인과 달리 상대적으로 온건적 개화를 지향하던 무리 중에서 고종의 총애를 시기한 자(김홍집?)의 소행으로 추측된다.
일본 사카모토 료마 암살의 경우 ‘꿈을 이룬 젊은이를 하늘이 거둬갔다’고 하는 반면, 이동인에게는 괴승(怪僧)이란 칭호만 남게 된다.
3. 박규수를 위시한 유대치(백의정승이라 불린 한의사), 이동인, 오경석(기미년 민족대표 중 일 인인 오세창의 아버지), 김옥균(갑신정변의 주역) 등은 한국 개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조선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자주적인 개화사상을 펼치고자 한다. 청나라로부터의 진정한 독립과 자주적 개화를 통한 조선의 발전을 꿈꾸며 일생을 투신한 선각자들이다. 이들에 대한 연구가 보다 깊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개화 추진 세력을 친일파라는 이름으로 덧씌우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친일파라면 실학사상을 주도한 북학파 인물들은 모두 사대주의자란 말인가?
비록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친일파에 대한 정의는 복거일 작가의 "죽은자들을 위한 변명"을 통하여 개념적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다.
---- 조선왕조 500년 제 23 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