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제 24 권 - 조선왕조 500년
제 24 권 [왕조의 비극]
1873년 대원군은 섭정 정치 10년 만에 고종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가납하고, 자신의 친정을 선언함으로써 정계에서 퇴출된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던가!
고종은 의욕적으로 개화 정책을 펼치고자 하는 반면, 중전 민씨는 대원군의 축출을 기점으로 민씨 척족들을 대거 조정에 유입한다. 그토록 대원군이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를 뿌리 뽑고자 척분이 없는 민씨 규수를 며느리로 앉혔건만, 오히려 민비에게 있어 자신의 집안만이 아닌 모든 여흥 민씨가 척족이 되는 그런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고종의 개화 정책은 갈수록 수구 세력과 갈등을 키워가고 있었고, 민씨척족정권이 저지른 인사행정의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패 및 국고의 낭비, 급속한 일본의 경제 침략 등으로 그들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날로 고조되고 있었다. 특히 항간에는 ‘민씨(閔氏)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민씨척족의 폐해는 심해져만 갔다.
게다가 청나라의 주일본 서기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 러시아 견제를 위하여 조선은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을 주장한 책]에 따라 1882년에 미국, 영국, 독일 등과 차례로 수호조약을 체결한다. 척화비를 세웠던 조선 백성으로서는 조정의 횡보가 심히 탐탁지 않고 심한 가뭄과 도처의 비리로 민심이반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촉발된 사건이 바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1882년(고종 19) 7월 23일 발생한 임오군란은 조선의 구식 군대가 별기군(別技軍: 일본에 의하여 창설된 근대식 신식 군대)과의 차별 대우에 항의하면서 조선 왕조에 대해 집단으로 일으킨 군란(軍亂) 사건으로 국가 단위로 군납비리, 병사들에 대한 급여 체불로 인해 발생한 사례이다. 즉 민씨척족이 군사 급료에까지 손대어 챙긴 비리의 결과물이다.
별기군에 대한 대우와 달리 구식 군대는 13개월에 해당하는 급료가 체불되어 있었고, 그나마 간청에 따라 1개월 치 군료를 지불받게 되었는데, 그 조차도 썩거나 모래가 뒤섞인 쌀로 지급이 되자 이에 분통이 터져 단체 행동에 돌입하게 된다. 선혜청 고직(庫直 창고 관리 책임자)과의 몸싸움은 물론 주무 당상관이자 병조판서인 민겸호(민비의 양오라버니 민승호의 동생)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오히려 난동을 부린 대가로 강경 진압을 당하게 된다. 이에 흥분한 병사들은 이성을 잃은 폭도로 발전하게 되고, 동시에 수많은 백성들도 가담하게 됨으로써 군란이 아니라 군과 민에 의한 난亂이 된다. 그들은 민씨 척신들과 관료의 집을 습격하고 마침내 이최응(대원군의 친형이지만 그와 대척점에 있던 인물), 민겸호(병조판서), 김보현(경기 관찰사)을 아주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리고 일본 공사관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일본 병사 몇몇이 사살되고, 이에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모든 문서와 공관을 불태우고 인천으로 피신하여 본국으로 도망을 친다.
흥분한 그들은 수구 척사 세력의 수령인 대원군을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그를 호위하여 궐내로 진입하게 된다. 폭동의 무리는 모든 비리의 정점에 있는 중전 민비를 죽이고자 궐 안을 헤매지만, 민비는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가마에 뛰어들어 궁녀의 옷으로 환복함으로써 신분을 감추고, 때 마침 나타난 무예별감 홍재희가 ‘궁녀로 있는 자신의 누이가 병들어 출궁중’이라고 둘러대며 민비를 등에 업고 궁 밖을 빠져 나간다. 이렇게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민비는 여주를 거쳐 충청도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에까지 가서 몸을 숨긴다.
폭도의 무리와 함께 다시 입궐하게 된 대원군은 고종으로부터 다시 섭정의 권한을 맡아 달라는 청을 접하게 되고 대원군의 재 섭정이 시작된다. 정확히 만 9년 만이다.
재집권을 하게 된 대원군은 흥분한 병졸들을 위로하고, 사라진 민비를 난중亂中에 죽은 것으로 공표하여 국장을 준비하도록 지시한다. 이는 비록 시신을 찾지 못했지만, 만약 살아 숨어 있다면 죽을 때까지 숨 죽여 있으라는 메시지였다. 혹은 밀정을 보내어 죽일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하지만 민비는 고종에게 밀서를 보내어 자신의 무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 군사 파병을 요청하기를 간청한다. 이에 고종은 청나라에 영선사를 보내게 되고, 청의 군사가 합법적으로 조선 땅에 진입하게 된다.
한편, 대원군으로 인해 조정의 분위기는 그간 진행된 개화에서 다시 수구 척사로 방향을 틀게 된다. 여기에서 대원군이 간파하지 못한 점은 당시 청나라는 양무운동(洋務運動:군사중심의 근대화 운동으로 서양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하는 정책)이 진행 중이었고, 이홍장을 중심으로 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국으로서 그들의 발언권을 잃지 않기 위해 조선과 서양 열강과의 강화를 자기 중재 하에 진행되도록 금 적극적으로 주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대원군의 수구세력은 그들의 생각과 시각이 달랐고, 오히려 청나라를 중심으로 진행시키고자 했던 조선의 개화라는 마스터플랜에 차질을 빗게 만드는 존재였다. 허나, 이를 모르는 대원군은 청나라 군사가 일본과의 협상에서 그에게 힘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고, 청은 이 같은 대원군의 허점을 이용하여 그를 청의 군진軍陣으로 초대, 납치하여 청나라 천진으로 호송하게 된다. 대원군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일이고 3년간 청나라에서 유폐(幽閉)생활을 겪게 된다. 33일간의 천하였다.
대원군의 납치가 이루어지자, 청나라의 입김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난군亂軍을 소탕하고자 주모자를 물색하여 처형하기 시작하며 조선의 군제를 개편하고 심지어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경제 외교 고문으로 심어둠으로써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다른 한 편, 일본은 일본대로 군란으로 입은 인적 물적 피해 보상을 주장하는 협상을 개진한다. 결국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물적 배상은 물론이고 일본은 공사관의 안전을 위하여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게 된다.
군란의 해결을 위하여 조선 조정은 결과적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사를 영내에 유입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조정은 자치적으로 통치할 능력이 없음을 만방에 알리는 꼴이 되어 세계열강의 좋은 먹잇감임을 스스로 천명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임오군란은 민씨척족정권이 추진한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과 정치, 경제, 사회적인 모순을 배경으로 일어난 군민의 저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의 호송으로 다시 정권을 되찾은 민씨척족은 그들의 정권 유지에 급급하였으며, 조선정부는 민씨척족과 개화파 관료계층 사이에 친청親淸과 친일親日 정책의 두 부류가 생겨나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결국 2년 후 갑신정변으로 이어진다.
갑신정변의 결정적 원인은 조선의 개화를 위한 방법과 정책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즉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청나라에 의존하는 청나라 양무운동 모델과 조선보다 20년 일찍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메이지 유신 모델 중에서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놓고 대립한 결과이다.
임오군란이후, 청나라는 조선의 모든 외교와 내치에 전격적인 간섭을 하고 있었고 이는 지난 500년간 이어진 중국 사대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암울한 미래를 제시할 뿐 자주 독립의 길은 요원한 것이 된다. 반면에, 당시만 해도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정신적 예속을 당한 상황은 아니고 오히려 상대적 우월감을 가진 상태였으며, 일본의 군사와 과학기술은 자체적으로 잘 소화되어 받아들이기 용이했던 점은 현실적인 것이라 판단되어 일본을 자주 독립을 위한 디딤돌로 삼고자 계획한 것이 메이지유신 모델이라고 생각된다(*양무운동 모델이나 메이지유신 모델이란 말은 상황설명을 위한 표현이지 학술적 용어나 통용되는 어휘는 아님).
친청과 친일 세력의 대립구도의 대표적인 예는 묄렌도르프와 김옥균의 갈등이다.
침체된 조선 경제의 활성화와 조세 확보의 방안에 있어 묄렌도르프는 당오전當五錢의 발행을 통하여 세수 확보를 하자는 입장이었고, 이에 김옥균은 당오전 발행은 지난 대원군 때 당백전의 예를 들어 극심한 경기 침체만 불러오고 일부 집권층의 배만 불린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면서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을 끌어와 국방 강화와 경제 활성화를 위한 투자를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묄렌도르프와 김옥균이 대립각을 세운 상태에서 민비를 비롯한 민씨척족과 그 척족을 추종하는 사대의 무리들은 임오군란 때 자신을 구해준 청나라에 일방적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급진자주개화파들은 점점 설 땅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폭제가 된 것은 <한성순보>의 연이은 기사였다.
1884년 1월 2일 청나라 군사 하나가 광통교에 있는 한 약포에 들어가 사람을 죽이고 도주한 사건이 있었고, 유야무야 깔아뭉개고 있는 청나라의 태도에 분노의 필봉을 휘둘렀다. 이 내용이 이홍장에게도 보고가 되었고, 그는 조선 조정을 압박하여 “한성순보에서 풍문만을 듣고 확이 없이 보도하였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며 심지어 청에 대한 사과를 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실상 그 범인은 조선인이 청병의 군복으로 변장한 것이다. 이를 잡아오면 후한 상을 내린다”며 현상금까지 내거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작자들은 힘의 논리에 따라 사실을 호도하고 윽박지르는 행태는 변함이 없다.
더 이상 사태를 방관할 수 없었던 급진개화파들은 왕권을 제외한 민씨척족세력과 그에 빌붙은 수구 세력들을 일소에 제거하는 길만이 조선의 안위를 위하는 방안이라 결론 내린다. 일본과 협조 체제를 구상하는 중에 청나라가 베트남 지역에서 프랑스군과 전쟁을 치른다는 소식이 전해오며, 청나라는 조선 주둔군 3,000명에서 1,500명을 안남지역으로 급파하게 된다.
세력 판도에서 서서히 밀려가던 개화파는 이런 국제 정세를 활용하여 수구 진영을 몰아낼 쿠데타를 기획하게 되는데, 김옥균은 고종과의 은밀한 배알을 신청하게 되고 자신의 조선 발전 계획 구상을 고종에게 진정성 있게 설명해 간다. 김옥균의 미래 구상을 경청한 고종은 조선의 자주 독립과 자강의 방책에 대하여 윤허의 뜻을 분명히 밝힌다.
1884년 10월 17일
개화파의 일원인 홍영식이 책임자로 있는 우정국(郵政局) 낙성 축하연을 거사일로 잡아 진행하기로 한다.
중도에 예상과 달리 차질을 빚은 사고가 있었지만, 개화파는 연회장에서 민영익 등을 제거하고 일본군 200여명의 호위 속에 창덕궁에 진입하여, 고종과 민비를 방어가 상대적으로 쉬운 경우궁으로 옮긴 후, 정강 14조와 내각 개편을 발표한다.
제 1항은 청나라와의 종주 관계를 폐지하고 대원군을 귀국시킨다는 대목이었다. 그 외에는 문벌 개혁(신분제 철폐), 환곡 폐지, 의정부와 6조, 특히 호조 중심의 재정 관할, 규장각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봉건적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청나라로부터 자주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이다.
경우궁으로 옮겨진 민비는 경기도 관찰사인 심상훈을 통하여 은밀히 청나라의 공사인 위안스카이에게 군병을 요청하는 밀지를 전달한다.
고종은 일본에게 병사를 요청하였던 바 있고, 이제는 중전인 민비가 청에게 지원병을 요청하는 경우가 된다. 고종의 의중과 민비는 이처럼 상반된 생각으로 정국이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유부단한 고종의 성격과 민비의 정견 간섭이 갑신정변의 결말을 좌우하게 된다.
민비의 요청으로 청의 군사 1,500명이 투입되면서 양쪽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게 된다. 마치 후에 있을 청일 전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수적으로 불리한 개화파가 밀리면서 전세를 뒤집기가 힘들어지자, 일본은 군사 철수의 명령을 내린다.
민비는 무당인 진령군(*진령군은 별도 서술)이 있는 북묘로 미리 피신을 했고, 패잔병이 된 개화파 중 박영교(박영효의 형)와 홍영식은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로 가는 도중에 살해되었으며,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은 양복으로 변장한 후, 인천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렇게 3일 만에 갑신정변은 실패한 쿠데타로 남게 되고 이를 3일 천하라고 부른다.
설익은 과일은 과일이 아니었음을....
갑신정변의 결과 조선은 일본과 한성조약漢城條約을 맺어 사의와 배상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조선 국왕의 친서에 의해 군사가 동원되었기에 모든 피해를 조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은 소위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게 되는데, 그 주요 내용은, 양국은 조선에 주둔하는 병력을 철수하기로 하고, 앞으로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있어 파병을 하게 될 때는 반드시 그에 앞서 문서로 합의할 것이며, 그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동 조약 중 ‘파병 시 상호통보 조항’은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다.
갑신정변의 전후를 통해 본 고종의 성격은 빈틈없는 대원군의 훈육과 손위 부인인 민비의 간교함 속에서 우유부단한 처세로 일관하지만 그의 속내는 자주 독립에 대한 갈망과 부국강병의 의지가 자리 잡고 있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재야학자이자 몇 해 전 타계하신 이이화에 따르면 “갑신정변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라,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된 조선 왕조를 부국강병의 국민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하여 지식인과 유학생 등 사회 급진 개화파의 목숨 건 몸부림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정변 실패 후에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5역적으로 규정되어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갑신정변으로부터 동학혁명, 갑오경장이 일어난 1894년 직전까지 10년간을 태평십년太平十年이라고 일컫는다. 이는 태평성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정세의 빠른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채 보낸 허송세월虛送歲月의 비유적 표현이다.
1894년 조선반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3차에 거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경장 등이 연쇄적이자 동시에 병행하여 진행된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반발하여 의거한 1차 동학농민운동은 탐관오리 처벌 등의 약속으로 평화적으로 매듭짓는 듯이 보였으나, 안핵사 이용태는 동학도들을 반란 세력으로 규정하여 무고한 농민들을 역적으로 처벌하는 등 강경 진압을 하게 된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무장 항전을 하게 되는데 이를 2차 동학농민운동이라 부른다. 동학도들의 2차 봉기는 고부의 황토현(현재의 정읍 덕천면)에서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하고 4월에는 전주성까지 손에 넣는다.
당황한 고종과 민씨 세력은 또 다시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첸진조약을 근거로 병력을 파견한다.
외세가 개입하는 형태로 진행이 되자 농민군과 관군은 청, 일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는데 이를 <전주화약全州和約>이라 한다.
전주화약에도 불구하고, 양국군이 귀환하지 않자,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실시하자고 제의하지만 청은 이를 거절한다.
그러자 일본은 3년간 청나라의 연금 생활에서 풀려나 은둔하고 있던 대원군에 동참을 설득하기에 이른다. 노탐인지 아니면 구국의 일념 때문이었는지 대원군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1894.6.21. 일본군과 함께 경복궁으로 입궁한다. 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의 무력 입궐을 경복궁 쿠데타 혹은 갑오왜란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다시 집권을 하게 된 대원군은 일본의 지시에 따라 김홍집을 중심으로 친일 개화 세력의 내각을 구성한다. 김홍집 내각은 조청수륙무역장정을 비롯한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한다는 통고를 보내게 되는데, 이는 일본의 강요로 청과의 국교를 단절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6월 23일 수원부 풍도 앞바다에서 청군과 일본군의 충돌이 일어난다. 선전포고도 없이 사실상 청일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김홍집 내각은 갑오개혁(갑오경장)이라 일컫는 내정 개혁안을 반포하는데, 주요 내용은 신분 제도의 타파, 연좌제의 폐지, 공사 노비 문서 혁파 등 급진적인 변혁을 시도한다(*동학군이 전주화약에서 제시했던 폐정개혁弊政改革 내용과 많은 부분이 겹치는데 이로 말미암아 근대화의 시발점이 동학혁명인지 갑오경장인지 여태껏 논란이 많다).
그리고 명분상 추대했던 대원군을 청나라 장수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4개월 만에 끌어 내린다.
한편, 전주화약으로 철수한 동학군은 일본의 갑오왜란에 공분하여 재집결한 후, 일본군이 가세한 관군과 재차 항전에 돌입한다. 일진일퇴의 상황이 이어지지만, 우세한 일본의 화력 앞에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현상금에 눈이 어두워진 밀고자로 인해 그 해 12월 녹두장군 전봉준이 체포가 된다.
청일전쟁에 있어 7월 1일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고, 양국 간에 전면전이 벌어지는데 이를 전후하여 비슷한 시기에 동학혁명, 갑오개혁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이 됨으로써 조선은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 그 자체였다. 조선이란 땅덩어리 내에서 청일 양국 간에 총질을 하고, 관군은 동학군과 싸우고, 신분제 타파를 외치는 내정 개혁안이 반포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개전 초기부터 전세가 불리해진 청은 이홍장을 통하여 서구 열강에 조정을 청해 보지만 묵살을 당하고, 일본군은 청의 본토까지 진입하게 된다. 결국 1895년 4월 항복 선언과 마찬가지인 세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게 되어 청은 일본에 2억 냥이라는 막대한 배상과 함께 요동반도와 대만, 팽후 제도 등을 할양하기로 한다.
요동반도는 동아시아의 주요 거점으로서 이를 일본이 확보하게 되자, 남하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진출을 견제하고자 요동반도를 반환할 것을 요구한다. 일본은 이들과 상대할 여력이 없음을 알고 러시아의 요구에 순응하게 되는데,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외교에서 실패한 전쟁으로 남게 된다.
10년 전, 1884년 갑신정변 이후부터 청과 일본을 견제하고자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오던 민비는 친청에서 친러로 돌아서게 되고, 삼림벌체권과 광산채굴권 등을 러시아에 부여하는 등 일본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더불어 김홍집 3차 내각을 친러 세력으로 구성하기에 이르자,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으로 조선 장악에 앞서 가던 일본은 주도권을 놓칠까하는 의기 의식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에, 일본은 손자인 이준용의 역모 의혹으로 곤경에 처한 대원군을 부추겨 민비 암살 계획에 동참할 것을 종용한다.
1895년 10월 8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하에 일본 자객들은 민비를 시해한 후 화장시켜 버리는 을미사변이 일어난다. 민비는 민씨척족으로 나라를 장악하고 진령군이라는 무당에 빠져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도가 넘는 사치로 국고를 탕진하는 등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한 나라의 국모가 시해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실제로 발생한 것이다.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른 일본은 대원군과 며느리의 갈등으로 이 사건을 몰아가고자 한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유지한 민비는 정확히 13년간 수명을 연장한 결과가 된다. 임오군란 때 체불된 13개월 치의 군료軍料가 왜 떠오를까? 과연 13이 마魔의 숫자인가? 13년이란 시간 동안 민비는 무엇을 했던가, 개과천선의 기회는 없었던가?
동 을미사변으로부터 4개월이 지난 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의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 러시아를 아라사라 불렀으며 아라사의 공관으로 피신했다는 뜻)이라 부른다.
한 나라의 임금이 자신의 궁궐을 내버려 두고, 외국 공관에 숨어 몸을 사리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개탄스런 장면이 아닐 수 없다!
1882년 임오군란 때부터 자국의 자치 능력, 자위 능력도 없이 외세를 불러 외세를 막는 형태가 반복되어 온 것인데, 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다른 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또 다른 적국을 제어함)와는 완연히 다른 것이다. 마치 자기 자본은 없이 이리저리 카드를 돌려막는 행태가 연상되는, 실로 한심한 작태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에 울분이 솟는다.
을미사변 이전부터 일본은 조선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차근히 준비해 가기 시작한다. 러시아의 최대 라이벌인 영국과 1902년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외교적 전선을 공고히 하는 한편, 미국으로부터 전쟁에 소요되는 전비戰費의 40%에 해당하는 차관을 들여오는데 합의한다.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와 러일전쟁을 발발하고, 이는 1년 6개월간 지속되는데 1905년 1월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소위 ‘피의 일요일 학살’이 터지면서 러시아는 어수선한 정국으로 빠져든다. 당시 러시아는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왕비가 라스푸틴이라는 무당에 빠져 제대로 된 통치가 어려운 실정이었고, 마침내 1905년 8월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를 체결하게 된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확인하는 내용이다.
미국 시어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은 동 포츠머스 강화 체결 직전 테프트 육군 장관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7월 29일 일본 수상 가쓰라 고고로와 가쓰라-테프트 비밀 협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어떤 침략적 의도를 품지 않고, 미국의 지배를 확인한다.
2.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 미, 영 3국은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를 확보한다.
3.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조선은 일본이 이를 지배할 것을 승인한다.
1882년 조선과 미국 간에 체결한 조미수호조약이 한낱 휴지 조각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동 조약 제1조에서 '만약 타국이 불공경모(不公輕侮)하는 일이 있게 되면 일차 조지(照知)를 거친 뒤에 필수상조(相助)하여 잘 조처함'이라는 항목을 흔히들 거중조정 항목이라고도 부르는데,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함으로써 상기 조항을 파기한 셈이 된다. 철저한 자기 이익을 근간으로 하는 미국 외교 정책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러시아와 체결한 포츠머스 조약 이후 일본의 조선 지배는 한층 가속화되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을 체결한다. 고종은 마지막까지 동 조약의 체결을 가납한 적이 없고, 8명으로 구성된 각의에 책임을 전가한다. 결국 각의 구성원 중 5인(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은 찬성, 3인(한규설, 이하영, 민영기)은 반대함으로써 가결이 되고, 이에 강탈당한 옥새가 찍히게 되는데, 문제는 고종의 재가裁可 어명御命이 없이 옥새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 을사년에 재갈을 물린 상태에서 체결된 조약이란 뜻)이라 부른다.
**이는 향후 한일합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원인 무효라는 법적 해석이 가능하기에 원천적으로 일본의 지배가 불법적이라는 근거가 될 수도 있지만, 나의 영역이 아니기에 후에 별도로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고 외국과 체결한 모든 조약도 무효화 된다.
이에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글을 게재한다. 그 글을 옮겨본다.
"지난번 이등(伊藤,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대한제국, 청나라, 일본 제국)의 정족(鼎足, 솥발)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대한제국)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官民上下, 공무원과 민간인, 윗사람과 아랫사람)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하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을사늑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고종 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生靈, 살아있는 영혼, 백성)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首席, 가장 높은 자리)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반대함으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金淸陰,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 동계 정온(桐溪 鄭蘊))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을사늑약이후, 1907년 고종은 국권 회복을 위한 마지막 모험을 한다. 바로 헤이그 밀사密使 사건이다.
고종은 이준, 이위종, 이상설 등을 밀사로 삼아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강압적 지배를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함이었다. 어렵사리 헤이그에 도착한 그들은 초대장이 없어 본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하고 간신히 기자회견을 가질 수 있었다.
이준은 회담 직후 호텔방에서 화병으로 숨지고 이위종과 이상설은 다른 유럽 제국을 돌면서 독립 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통감부는 한국 법부를 강압하여 특사들을 기소하고 1907년 7월 20일 평리원이 궐석재판을 개정하여 이상설은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은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귀국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에 시베리아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하였고, 이위종은 페테르부르그로 떠난 후 생사가 묘연해져 버렸다.
동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고종에 책임을 물어 강제 퇴위를 시키고 순종으로 뒤를 잇게 한다.
1908년 3월 23일 일본에 의하여 한국의 외교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 암살 사건이 샌프라시스코에서 일어난다. 일본의 사주를 받아 일본의 조선 침략을 미화하던 스티븐스를 미국에 거주하던 장인환과 전명운이 암살한 것이다.
전명운의 권총은 불발이 되어 스티븐스를 총으로 구타하였고 뒤를 이어 장인환이 3발을 쏘았는데 2발은 스티븐스에 명중하고 다른 한 발은 전명운에 맞았다.
전명운은 치료 후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고, 장인환은 10년의 복역 후 석방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동 암살 사건에 사전 모의한 바가 전혀 없었고 우연히 같은 날 같은 인물을 저격한 것이었다. 이심전심으로 구국의 정신이 통하여 스티븐스를 저격한 것이었다(역사학자 이이화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안창호가 결성한 공립협회의 조직원으로서 스티븐스를 저격하는 지령을 받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보다 더 큰 사건이 1909년 발생한다.
안중근에 의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다. 탈아시아를 기치로 내걸어 제국주의적 이상을 추구한 흉적을 하얼삔에서 저격한 것이다. 조선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부인한 인물에 대해 가차 없는 응징을 한 것이다.
안중근의 신념은 조선은 물론 수 천 만 중국 인민의 심장을 울렸고 죽음 앞에서 당당했던 그와 모친 조마리아의 의기義氣는 조선 민족의 기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에 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고 심지어 그를 신격화하는 움직임도 있다.
내가 아는 이토 히로부미의 원래 이름은 이토 슌스케였고 삿쵸동맹 당시 서구 열강으로부터 무기 밀매에 관여하였으며 후에 영국으로 유학을 잠깐 다녀온 인물이다.
그는 민비 시해부터 을사늑약까지 모든 조선반도 침략의 실질적인 기획을 했던 책임자였다. 대한의 열혈남아라면 그를 저격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의 암살은 실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안중근의 저격으로 한일합방이 가속화되었다는 일부 논리도 있지만 이는 정말 헛소리라 하겠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합방이 진정 현실이 된다.
믿을 수 없고 믿기지 않는 일들이 현실이 된다.
경술국치일은 바로 1910년 8월 29일로 기록된다.
조선왕조실록 외에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 황현은 9월 10일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이 몸 담아온 왕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그의 만사輓詞(절명시)를 옮겨 적는다.
난리를 겪어오며 머리가 셀 때까지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 해도 이루지 못하였다.
궁궐을 침범하여 주루가 더디고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위에 올올이 어리는구나
...........
일찍이 나라위해 작은 공조차 없었으니
단지 인仁을 이뤘을 뿐, 충忠은 아니구나.
겨우 능히 윤곡(尹穀 : 송나라때 몽고의 침입에 온 가족이 자결함)을 따르는데 그칠 뿐이요
당시의 진동(송나라 때 적을 탄핵하는 상소로 왕에게 죽임을 당함)을 밟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P/S
1. 민비가 행한 국정 간섭의 폐단 중 하나는 바로 진령군(眞靈君)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민비가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죽음을 피해 피신하였을 때, 한 무당이 찾아 와 아무 날에 궁중으로 환궁할 것이라 했는데 그대로 맞아 떨어지자 그 무당을 궁궐로 데려오게 되었다. 민비의 병도 다스렸는데 그 무당이 어루만지면 아프던 곳도 나았다고 한다. 그 무당의 건의에 따라 관왕묘를 세우고 진령군에 봉하게 된다. 무당에게 작호爵號를 내린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궁중의 화복을 자신의 손아귀에 쥔 진령군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수령의 자리에 앉히고 서로 의자매나 의자義子 관계를 맺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조병식(황해도 감사이자 고부군수 조병갑과 사촌지간), 이유인(양주 목사) 등이다. 민비로 하여금 허약한 세자(순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굿을 하고 금강산 1만 2천 봉 마다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을 바쳤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관우의 딸이라고 자칭하면서 나랏돈으로 서울 북방에 관우 사당인 북묘(관왕묘)를 건립하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억만금을 벌었는데, 왕과 왕비는 여기 자주 찾아와 점도 치고 굿도 하였다. 이런 굿과 사치로 내탕고가 비게 되면 온갖 엽관배가 이권을 팔아 다시 채워 주었다.
이런 마당에 민비를 명성황후로 불러야 한다는 둥, 혹은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가당치도 않은 말들이 뮤지컬에 등장하는 작태를 보노라면 한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민비는 왕비에 대한 호칭으로 예의에 어긋나는 말이 아닐뿐더러, 명성황후라 한다면 고종을 광무제로 불러야 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또한 을미사변 때 상궁의 의복으로 변복을 하고 피신하던 차에 자신이 왕비임을 드러낼 리가 만무하지 않을까?
만약 민비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탈출이 불가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대원군의 집권과 함께 개혁의 의지가 나름 있었던 고종 간의 불화가 명약관화하지만, 국모까지 척결하는 민심의 무서움을 깨닫고 새로운 타협안을 모색하였으리라 보인다. 국토 개발권을 팔아 내탕고를 채우는 일 없이, 외세에 의존하여 정권의 안정을 꾀하는 시도는 최소한 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자치가 가능한 경우와 외세에 기대어 정권을 유지하는 것의 차이는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박규수를 총애한 적이 있는 대원군과 고종은 어떻게든 완급 조절을 하면서 자생적 발전 모델을 찾고자 했으리라. 임오군란의 발발과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답이 숨어 있는 듯하다.
2. 진령군과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에는 그레고리 라스푸틴이라는 요승이 있었다. 라스푸틴은 본래 떠돌이 수도자에 불과했으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로마노프 황태자의 병을 호전시킨 업적으로 알렉산드라 황후의 탄탄한 신임을 얻은 후부터 비선실세가 되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두르면서 러시아 제국의 몰락에 크게 일조한 인물이다. 러일전쟁 패배의 요인이 되는 피의 일요일 학살도 라스푸틴에 의하여 저질러진 일이며, 이로 인해 서구권에서 라스푸틴은 간신의 대명사 중 하나처럼 되었다.
3. 갑신정변의 주역 중 일원인 홍영식은 1882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으로 가서 역체국(驛遞局: 우체국)을 시찰하여 우편 제도를 연구하게 된다. 다음 해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전신, 전화, 우편 등 통신과 관련된 기구와 실상을 알아보고, 1884년 우정총국의 총판으로 임명된다. 전통적인 봉수제와 역참제가 없어지고 근대적 우정郵政이 시작되는 시기였으나 갑신정변 거사 일에 홍영식은 고종을 호위하다 29세의 나이에 변을 당한다. 애석한 일이다.
4. 서재필의 행적은 근대사에 많은 의미를 갖는다. 갑신정변의 실패 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미국으로 향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학업에 열중하여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병리학 박사학위를 딴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으며 1895년 12월 귀국하여 독립신문 발행과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독립문 건립, 만민공동회를 개최한다.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알리는 등 입헌군주제에 기반을 둔 대한제국의 수립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수구 세력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강조한 나머지 세계열강들 또한 그와 생각을 달리한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의 아내는 미국인 뮤리엘 암스트롱이다.
5. 동학혁명은 동학의 교리에 따른 동학도들이 주축이 된 반란이고, 동학의 중심사상이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하늘이다)으로서 봉건적 신분제도를 배척했다는 점에서 한국 역사의 근대화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인내천 사상은 만민평등주의와 민본주의를 주창한 것이고,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창의斥倭倡義를 기치로 세운 것은 민족주의의 발현이었다. 동학운동의 잔병들은 후에 독립 의병으로서 항일 전선의 선봉에 서게 된다. 비록 모두 실패하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은 위로부터의 혁명, 그리고 1894 동학운동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
6. 동 작품 조선왕조 500년의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가 작년 11월이다.
총 24권의 작품을 읽고 한 권 씩 요약한 시간이 어느덧 9개월이 된다. 그간 요약했던 파일을 모아보니 120쪽에 이른다. 나름 재미있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지만, 과거 역사가 자랑스러운 일들만 있는 것이 아니 듯, 가슴 아픈 순간들이 더 많았다고 하겠다.
내가 보낸 9개월이 앞으로 내 인생의 10년 동안 많은 영감과 지혜의 원천이 되리라 믿는다. 길고 지루한 시간도 있었지만, 이 같은 분량의 작품을 쓴 작가는 어땠을까. 신봉승 작가에게 더할 나위 없는 존경과 찬사를 보내고 싶다. 생존해 계시다면 막걸리 한 잔 올릴 텐데 아쉽기만 하다.
----- 조선왕조 500년 제 24 권(마지막 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