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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Jul 01. 2023

조선왕조 500년 제 22 권


조선왕조 500년

제 22 권 [강화 도련님]


제 22 권은 조선 역사에 있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바로 철종의 즉위이다. 철종(1831~1864)의 원래 이름은 이원범인데 바로 정조의 이복동생 즉 사도세자의 후궁을 통하여 생산된 은언군의 손자가 된다.

먼저 항렬 상으로 보면 정조와 은언군은 같은 항렬이다.

정조의 손자뻘이니까 이원범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와 같은 항렬이라고 할 수 있다. 효명세자가 급사를 하게 되고 그의 자손이 대를 이어 헌종이 되는데 이원범은 헌종에게 작은아버지뻘이 되는 것이다. 허나 헌종이 후사도 없이 승하를 하게 되자 세도정치를 누리던 안동 김문(金門)에서는 왕족을 물색하여 강화도에서 지게발이(나무꾼)를 하던 이원범을 왕좌에 올려놓고자 한다. 항렬 상으로 보면 작은아버지가 조카의 뒤를 잇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단종을 폐하고 세조가 등극한 것과 비슷한 경우인데, 세조는 계유정난을 통하여 왕위를 찬탈(?)한 경우이지만, 이원범은 정작 본인은 영문도 모른 체 덩그러니 왕위에 떠받혀진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게다가, 단 하루도 궁궐에서 보낸 시간이 없으니 교육은 물론 왕재로서의 수양을 쌓은 적도 없는 인물이었다.

안동 김문이 내세운 허수아비 임금 그 자체였다. 그들이 조종하기에 안성맞춤인 인물을 선별하여 왕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왕실 최고 어른이 된 순조의 정비 순원왕후가 안동 김씨이고, 그의 동생 김좌근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문이 순조 때부터 국정의 모든 대소사를 좌지우지하는 형국이었다.

철종이 된 이원범의 배필 또한 안동 김문인 김문근의 여식을 중전으로 간택함으로써, 왕실의 전주 이씨 종친들은 모두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목숨만 근근이 유지하는 꼴이 되었다.

이처럼 안동 김문의 위세는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기에 그들은 뜻있고 영특한 왕재의 자질이 보이는 왕족이 있을 시에는 언제든 그와 연루된 역모를 조작하고 고문으로 억지 자백을 끌어내어 모함을 씌워 제거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그 어떤 왕실의 종친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에 관하여 조금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한데, 은언군의 맏아들 이담은 바로 홍국영에 의하여 원빈 홍씨(홍국영의 누이동생)의 양자로 입적된 바 있고, 당시 완풍군이라 명명하였다가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괘심 죄에 걸려 홍국영의 낙향으로 이어진 바 있다. 이담은 완풍군에서 상계군으로 바뀌었고 홍국영등과 연루된 역모 혐의로 사약을 받았고, 아버지 은언군과 이담의 이복동생인 전계군 등은 함께 강화도로 귀향길에 오르게 된다. 전계군의 둘째 아들이 바로 이원범이며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연명하며 살다가 철종이 된 인물이다. 은언군은 부인인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인 군부인 신씨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로 부터 세례를 받는 등 천주교에 귀의를 함에 따라 1801년 신유박해 때 사사를 당하게 되고, 은언군도 피신을 하였으나 곧바로 체포되어 사약을 받는다. 왕자로 태어났으나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느닷없이 철종이 된 이원범의 인생도 덩달아 기구하다 할 수 있겠다.

 

보위에 오른 철종은 강연이 아니라 학습을 해야 했고, 매일같이 강화도의 산골과 푸른 바다를 그리워하며 지척에 둔 고향 생각에 향수병 환자마냥 하루하루를 보낸다.

정치도 잘 모르지만, 어느 정도 궁궐 생활에 익숙해질 만한 세월이 흘렀어도 자신이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한 문중에 의하여 펼쳐지는 세도정치의 가장 큰 병폐는 바로 부패에 있다. 하찮은 말단 관직이라도 차지하려면 그들에게 뇌물을 써서 자리를 얻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관직을 차지하게 되면 뇌물로 쓴 본전을 뽑아내기 위하여 백성에 대한 착취로 이어지는 법이다.

이는 바로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이어진다(삼정의 문란은 제21권 참조).

정조 말기부터 시작된 삼정의 문란은 순조와 헌종 그리고 철종에 이르러 극에 다다른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와 왕실의 무력함에 반발하여 전국 곳곳은 민란이 봉기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곳이 진주였다. 당시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역모가 아닌 민란이라 함은 그들이 얼마나 먹고살기 힘들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회의 단면이었다. 진주에서 시작된 민란은 삼남 지방 전역으로 확산되고 심지어 제주도에서도 봉기가 일어난다.

이에 세도정치의 핵심 인물인 김좌근과 그의 아들 김병기는 소위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 이정이란 정리하여 다스린다는 뜻으로 삼정의 폐악을 시정한다는 의미)을 설치하여 민심을 무마하고자 했으나 국고가 비어 있어 실행할 예산도 없었기에 허울뿐인 기관이 되고 말았다.

삼정의 문란은 세도정치에 따른 병폐이기도 했지만 더욱 근원적인 이유는 아전이라 일컫는 지방 하급 행정 원들이 무보수로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지방의 토착민 출신이며 실무 행정의 전문가로서 중앙에서 파견한 관료들은 그들의 행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실무적인 업무는 전적으로 아전들에게 의하여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관아에서 그들에게 급료를 지급하지 않았으니 백성의 재물을 강탈하여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고 백성들은 아전들의 위세에 눌려 현감이나 군수보다 그들을 더 무서워하기에 이른다.


한편 이같은 시국의 흐름을 묵묵히 관망하며 쪼그라든 왕실의 재건을 위해 때를 기다린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흥선군 이하응이다.

이하응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로서 추사 김정희로부터 글씨를 배우고 특히 그가 그린 석파란(石坡蘭. 석파는 이하응의 호)은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이남에서 최고가는 것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이하응은 세태를 묵묵히 읽고 있으면서 자신의 아들 재황이 태어나자 그를 왕위에 올리는 대망의 꿈을 품는다.

당대의 명필이자 석학인 김정희와의 교류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 기세등등한 안동 김씨 세도 내에서 살아남고자 자신의 체면과 지위를 모두 버리고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투전과 기방의 출입으로 자신의 위신을 스스로 깎아내린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을 가슴에 담고 흥선군의 젊었을 적 영특했던 기억들을 세간으로부터 하나씩 지워나간다. 그리하여 그는 궁도령(궁상맞게 세도가에게 경제적 도움을 수시로 요청한 데서 유래)  혹은 상가집의 개(아무 상가집에서나 주책없이 술판을 벌이고 변죽 좋게 밥을 청함)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르고, 결국 안동 김문의 경계 대상에서 벗어 나게 된다.

이렇게 10년의 세월동안 맘속에 칼을 품고 아들 이재황에 대한 교육만큼은 빠짐없이 챙겨가며 시운을 기다린다.


1857년(철종8) 안동 김문의 수반이자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68세로 승하한다. 고로 왕실의 최고 어른 자리는 신정왕후에게로 넘어간다.

신정왕후는 풍양 조문으로서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세자빈이었다. 효명세자가 사후에 익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왕후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고, 지난 30년간 위로는 순원왕후(순조의 정비, 안동 김씨), 아래로는 효현왕후(헌종의 정비, 안동 김씨), 철인왕후(철종의 정비, 안동 김씨) 사이에 끼어 숨 한 번 크게 내쉬지 못하는 세월을 보내왔던 것이다. 이제 신정왕후의 위세가 힘을 떨칠 시기가 도래하는 것이고, 안동 김문으로서도 커다란 배경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철종과 철인왕후가 안동 김문의 수하에 있음에 아직 때는 무르익지 않았다.

철종과 동시대 인물인 일본의 사카모토 료마(1836~1867)가 자주 내뱉던 "종기는 완전히 곪아야 짜낼 수 있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흥선 이하응은 물밑에서 서서히 풍양 조문의 인맥으로 신정왕후를 접촉하고자 한다. 신정왕후 역시 안동 김문을 몰아내기 위해 왕실의 종친과 결탁할 수밖에 없는데 지난 세월 파락호 같은  이하응의 행적이 과연 어떤 의도였는지 감지하고자 다방면으로 알아보고 특히 이하응의 아들이 왕재의 자질이 있는지 면밀히 따져본다. 세도정치에 따른 국정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왕권의 강화가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기에 이른다.


외적으로나 실질적으로 국정운영을 책임지고 있던 안동 김문에게 크고 작은 문제들이 안팎으로 이어진다. 국왕으로 앉힌 철종은 젊은 나이임에도 후사도 없이 수시로 병석에 눕고, 3정의 문란은 갈수록 심해지며 홍수와 기근 역질로 흉흉해진 민심은 천주교와 동학에 마음을 기대어 의존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천하제일의 대국으로 알고 있던 청나라는 이미 1842년 서양 오랑캐인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어이없이 패하고 말았으며 해안에 출몰하는 이양선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실로 총체적 난국이 아닐 수 없고 백성들의 삶은 아비규환 지옥도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1863년 철종은 33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선원보감(왕실 조상의 계통)을 뒤져가던 안동 김문이 미처 철종의 후사를 이을 대상을 결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신정왕후는 발빠르게 대보(大寶 옥새를 의미)를 손에 넣는다.

그리고 흥선의 아들 이재황을 효명세자 익종의 양자로 입적시켜 익성군으로 봉한 후, 그가 대통을 잇게 됨을 반포한다. 그가 바로 고종이 된다. 대비마마 신정왕후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그가 가진 권한을 한껏 행사하는 것이었다.

신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됨과 동시에 흥선 이하응의 소원도 함께 성취되는 순간이다.

또한 조선의 험난한 다른 고비가 움트는 시기이기도 하다.


 * P/S

1. 전언한 바와 같이 철종은 헌종의 삼촌뻘이 된다. 이것은 예송 문제를 야기하는데, 이 문제가 구체화된 형태가 기유예론(己酉禮論)이었다. 임금이 제사를 받들 때 선왕의 호칭과 자신의 호칭을 말해야 하는데, 헌종과 철종을 왕실 족보(선원록)대로 숙질 관계로 칭할지, 그냥 즉위 순서대로 부자 관계에 준하여 칭할지가 관건이었다. 전자를 따를 경우 철종은 헌종의 제사를 받들 때 "황질(皇姪, 훌륭하신 조카)께 고합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호칭이 다소 우스운 건 둘째치고 조천(祧遷: 종묘(宗廟)의 본전(本殿) 안에 있던 위패(位牌)를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시는 일을 이르던 말)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에 이 문제는 의외로 꽤 민감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막강한 권력은 결국 이 문제를 제기한 김정희를 다시 유배 보낸다.


2. 1860년대 일본은 약 250년간의 도쿠가와 막부시대가 마감되는 대정봉환(大政奉還 : 1867년에 일본 에도 막부가 반막부 세력에 의해 국가 통치권을 천황에게 돌려준 사건)이 이루어진다. 주도적 역할을 한 사카모토 료마는 철종과 정확히 동시대 인물이다. 정말 애통하게도 이 시기가 바로 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확연하게 벌여놓은 계기가 된다.


3. 청나라와 영국간의 아편전쟁은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842년(헌종8)과 1856년(철종7)두 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청나라는 완전히 서양 세력에 굴복하였고, 조선 또한 더 이상 은둔의 나라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굳이 외면하면서 눈앞의 정치싸움에 몰두하고자 했다. 도도히 흐르는 변화의 물결을 애써 무시한 대가는 역천자逆天者의 말로를 향해 빠져들고 있을 뿐이었다. 붕당정치와 세도정치에 함몰된 과거의 시간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럽다.


                            

                              -------조선왕조 500년 제 22 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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