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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Jun 18. 2023

조선왕조 500년 제 21  권


조선왕조 500년 제 21 권 - 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21 권 [정조 이산]


동 21 권은 정조가 보위에 오른 1776년부터 1849년 헌종이 승하하는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조선왕조의 부흥을 위한 정조의 마지막 불꽃과 스산하게 스러져가는 한 왕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인다. 참고로, 1776년이면 청나라는 강희대제,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의 치세였고, 美대륙에서는 13개주가 아메리카합중국(U.S.A)의 수립을 서명한 해이다. 그리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있었던 바, 세계적으로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다.


정조의 치세는 크게 나누면 실학의 융성과 천주교의 도래라고 할 수 있다.

탕평책은 영조가 내세운 정치적 기치였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노론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는 구조였고, 정조는 즉위부터 과감한 인재 등용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한다. 특히,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정조는 노론에 대한 복수의 심정이 차고도 넘쳤지만 이를 정치적 보복으로 나아가지 않고 국익을 위한 치세로 승화코자 노력한다. 이 점은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원수를 갚고자 갑자사화甲子士禍의 피바람을 일으켜 결국 파탄으로 치달은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었다.

노론의 일당 중 홍인보의 잔당 세력들은 정조에 대한 암살을 기도하는 등 일련의 소요 사태를 만들지만 이를 기화로 자신의 최측근인 홍국영을 도승지와 금위대장을 겸하게 하고 숙위소를 지어 모든 의사 통로를 홍국영을 통하도록 한다. 결국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홍국영은 후사가 없는 정조에게 자신의 누이를 후궁으로 앉혀 후사를 도모하는 자리에 서게 되니 그야말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그러나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씨는 1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자, 홍국영은 사도세자의 3남이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 이담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들이게 하면서 다른 후궁을 들이는데 결사반대를 한다. 즉 양자 이담으로 하여금 정조의 뒤를 잇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담에 대한 군호를 완산(전주)에서 완完을 따고 풍산에서 풍豊을 따서 완풍군完豊君으로 짓는다. 즉 전주 이씨의 본관과 풍산 홍씨의 본관을 합한 이름인데 이것은 조선과 풍산 홍씨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 같은 홍국영의 지나친 전횡은 혜경궁 홍씨는 물론 정조로부터 신뢰를 잃게 되어 그는 32살의 나이에 낙향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강릉에서 요절하는 종말을 맞게 된다.

정조는 홍국영을 통하여 당쟁에 매몰된 신료들의 정치 풍토를 쇄신하는 나름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고, 홍국영의 도가 지나친 행위에 일침을 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신료들의 기강을 다잡고 왕권을 튼실히 하는 정치적 효과를 거두게 된다.


정조는 역대 임금 중에서 평생 학습을 몸소 실천한 가장 학구적인 왕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종대왕에 버금갈 정도로 . . .

정조는 모든 학문의 산실이자 인재들의 집합소로서 규장각奎章閣이라 명명한 전각을 지어 그 역할을 전담하게 금 한다. 스물여덟 별자리 중에 인재를 뜻하는 별을 규성奎星이라 하는데, 규장각이라 함은 그 규성들이 모인 곳, 훌륭한 인재들의 집, 좋은 책들을 모은 집이라는 뜻이다.

정조는 홍대용에게 규장각 직각(直閣 규장각의 실질적인 책임자)의 직책을 주고자 하였으나 홍대용은 극구 사양의 뜻을 전하고, 지방 군현을 맡아 다스리기를 희망한다. 그는 외직으로 물러가는 대신 자신의 문하로 들어와 실학을 연구했던 뛰어난 후학들을 천거한다. 박제가, 서이수, 유득공, 이덕무 등이다. 그들은 서얼만 아니었다면 벌써 대과에 오르고 당상의 지위로 등용될 사람들이었다. 정조는 서얼 출신일지라도 그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한다.  

박제가는 영의정인 채제공의 추천으로 청나라 진주사절단陳奏使節團의 일원으로 연경에 가게 되고, 그가 보고 체험한 것을 모아 <<북학의北學議>>를 발간하게 된다. 박제가의 생각은   "청나라를 오랑캐라 무시하고 배청사상을 드높이는 것이 무슨 득이 있으랴. 그들에게는 대륙을 유린하여 장악한 힘이 있다. 그들을 오랑캐라 탓해 무엇하리. 그들의 앞선 것을 좇자면 너무도 먼 것을. 사심없이 배워서 내 것으로 삼으리라"는 일념으로 부단히 조사하고 하나하나를 공부해왔다. 북학의(北學議)는 내편 39항목, 외편 17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레와 배, 성벽의 구조, 궁실, 도로, 교량, 목축, 농잠, 과거, 재부財賦 등에 관한 설명과 의견이 들어 있다.

이전의 학자 홍대용이 <<담헌집>>을 썼고, 이후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쓰게 되며, 홍양호가 <<이계집>>, 유득공이 <<냉재집>>, 이덕무가 <<청장관전서>>를 쓰게 되니 이것이 곧 북학파를 실학의 큰 학문으로 평가하게 하는 서책들이며, 사대주의를 가장 슬기롭게 극복한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의 근저를 이루게 하는 의식들인 것이다.

   

한편, 춘추 35세에 이른 정조의 고민은 아직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의빈 성씨의 몸에서 얻은 세자는 책봉된 지 2년 만에 목숨을 잃었고, 다른 후궁 수빈 박씨를 들였으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묏자리를 탓하며 후손이 없음은 왕통을 잇지 못한다는 말에 정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이 복 받혀 이장을 결심한다. 결국 양주 배봉산에서 길지로 택해진 수원 화산華山으로 이장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수원부에는 2,000여 호의 민가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이를 팔달산 자락으로 옮기고, 묘역을 이장하는 대공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수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도시가 되는데, 조정에서는 신도新都에 사람이 모이도록 10년간 조세를 감해주고, 장사와 함께 주막거리를 짓도록 권장한다.

그리고 수원 신도에 성城을 쌓도록 정약용에게 지시하여 정약용은 기중기를 이용하여 성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조선 과학 기술이 진일보한 증거물이 바로 오늘날의 수원 화성이다.

사도세자 묏자리의 이장 덕분인지 정조는 수빈 박씨로부터 세자를 생산하게 되고, 이가 후에 순조가 된다.


당시 실학의 거봉이었던 정약용은 2세 때 천연두를 앓았지만, 오직 오른쪽 눈썹위에만 자국이 남아 눈썹이 세 개로 나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삼미자三眉子라는 호를 썼으며, 10세 때 삼미자집이라는 문집을 내기도 한다.

그가 7세 때 지은 오언시五言詩는 아래와 같은데,

小山蔽大山

遠近之不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음은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시를 보고 아버지 정재원은 “분수分數에 밝으니 역법曆法과 산수算數에 통달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정약용은 서울에 와서 성호 이익의 유고遺稿를 처음으로 접하면서 학문의 참뜻을 어렴풋이 깨치게 되었고 아울러 자신에게 형성되어 있다고 믿은 학문의 허상도 함께 깨달아 공부의 체계가 바뀌게 되었다. 18세 되던 해 성균관 승보시에 뽑혔으며 권철신이 개최하는 천주교 강학회에 들어 많은 것을 깨치게 된다.

1783년 21세에 생원이 되는데, 이 때 정조는 진사와 생원에 오른 유생들을 불러 접견을 한다. 이것이 정조와 정약용의 첫 만남이었고 그로부터 정조는 정약용을 각별히 아끼게 된다.

정약용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은 천주교와의 만남이었다. 새로운 철학과 종교 체계를 갖춘 소위 서학西學은 문자 그대로 다른 세상에 대한 개화의 눈을 뜨게 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린 조선 아니 한반도에 자생한 천주교의 탄생을 되짚어봐야 한다.

조선의 천주교는 세계에 유례가 없이 자생적으로 성장한 종교이다. 유교적 관습에 얽매어 있던 18세기 후반에 당시 지식인들은 시대적 변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새로운 삶의 체계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북학파들을 위시한 실학사상實學思想을 통하여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이와 함께 새로운 종교관이 자연스레 움트기 시작한다.

전언한 바와 같이 1776년 미국은 독립을 선언하고,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는 세계적 근대화의 바람이 비록 폐쇄적인 환경이라고는 하나 조선반도도 그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며 그 시작은 시대를 주도하는 젊은 지식인들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조선 천주교의 발현은 중요한 사건과 내용이 너무 많고 동 작품 21권의 절반 이상이 초창기 천주교에 관한 내용이라서, 내 나름의 방식으로 아래와 같이 간략히 정리하고자 한다.


지금은 성지聖地가 된 천진암에 가면, 소위 성현聖賢 5위位라 해서 다섯 분의 묘소가 있다. 그 5인은 이벽,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그리고 권일신이다.

이 다섯 분이 주도하여 천진암에서 천주교에 대한 강학講學을 시작하였기에 성지로 받들고 있다. 강학이란 것은 지금으로 보면 성경공부이자 천주교 신학 연구라고 해석해도 무방하겠다.

주교도 없고 신부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천주교의 교리와 종교관을 이해하고자 서로 공부하고 토의하며 하나씩 깨우쳐 간다.

상기 5인에 대한 면면을 보면 이벽(1754년생)은 경주 이씨로서 나주 정씨 정약전(1758년생, 정약종의 형)의 이복형 정약현의 누이와 결혼을 한 처남매부지간이다. 이승훈(1756년생)은 평창 이씨로서 또한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한 사이이다.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은 첫 부인으로부터 정약현과 딸을 얻게 되고, 두 번째 부인이 바로 유명한 윤선도의 5대 증손녀인 윤씨이고 그로부터 정약전(1758년생), 정약종, 정약용 3형제와 누이를 생산하게 된다(전라도 남부에서 가장 큰 갑부집안인 어머니 해남 윤씨의 도움으로 후에 정약용은 강진 유배 생활 동안 많은 도움을 받게 되고 심지어 다산초당도 해남 윤씨의 여름철 별장을 빌린 것이고 그곳에서 그는 수많은 명작들을 편찬하게 된다). 이승훈의 외숙부는 당대의 석학 이가환(1742년생, 여주 이씨)이고, 여기에 성호 이익을 계승한 권철신(1736년생 안동 권씨), 권일신 형제가 함께 하게 된다.

상기 언급된 인물 중 정약종의 형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은 마지못해 배교背敎를 하고 유배를 떠나게 되며, 다른 분들은 모두 순교를 할 뿐만 아니라, 그 형제와 자식 며느리, 손자까지 박해를 받아 순교를 한다. 특히 이승훈은 그로부터 4대에 걸쳐 총 8명이 순교를 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집안이 된다.

 

이벽은 5대조가 되는 이경상이 당시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함께한 인물이었는데, 8년 동안 서양인 신부 아담 샬로부터 많은 서양책을 얻었고, 이 책들은 그때부터 이벽에 이르기까지 가보로 전해온 것이었다. 이벽은 서양의 합리적인 사고와 천주의 가르침을 음미하여 학문에 눈을 뜨고 천주에 대한 신앙심을 키우고 있었다. 그가 아홉 살 때 <천학고天學考>를 지을 정도로 조숙했다.

이벽은 이승훈이 그의 아버지 이동욱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가게 되고 그 또한 군관으로 동행하게 되자, 이승훈에게 부탁하기를 연경에서 천주교에 대한 보다 깊은 믿음을 갖기 위해 진정한 천주의 아들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연경에 도착한 이승훈은 천주교 교리, 천문학, 수학, 과학을 공부하고 마침내 1784년 그라몽(Jean de Grammont)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 천주교의 반석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선교사가 찾아가지 않고 미교화국의 청년이 자진해서 세례를 받아 천주교인이 되는 사례 또한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1784년 4월 이승훈은 성서, 천주교 자료, 성상, 묵주, 기하학, 각종 과학 서적 등을 가지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승훈은 비록 신부는 아니지만 이벽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준다. 그리고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가짐으로써 명실 공히 최초의 천주교회가 된다(113년이 지난 1898년 이곳에 고딕식의 장엄한 명동성당明洞聖堂이 건립된다).

정약종은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을 포기하고 다른 형제들과 달리 보다 적극적으로 천주교에 귀의하는데 1795년 조선에 처음으로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맞아 한국 최초의 조선천주교 회장을 지내며 갖은 탄압을 이겨낸 인물이다.

권철신은 성호 이익의 문하생으로 이승훈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66세의 노령으로 고문 끝에 옥사하였고 동생 권일신 또한 신해박해로 구속되었다가 유배지로 가는 도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객사를 한다.


서학(西學)에 대한 정조의 입장은 매우 담담하고 개방적이었다. 그의 지론은 소위 정학론(正學論)으로서 사학邪學이 아무리 날뛰어도 정학 앞에서는 빛을 잃게 마련이며 사람들이 서학에서 얻고 깨달은 것으로 유학을 보輔하게 하여 정학을 다지는데 기여한다는 논리였다. 정학론으로써 실학자들을 가까이 두고 자신의 치세를 참되게 영위해 나가고자 애쓴다.

박제가도 정약용도 그가 아는 한 외국의 제도와 문물을 서학책을 통해 얻어와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게 한 인물이었다.


 1800년 평소 안질로 고통받았던 정조의 등에 원인모를 종기가 생겨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그해 6월 정조는 고통속에서 허무하게 눈감고 말았다. 하늘이 조선왕조를 저버리는 마지막 순간이랄까 역사적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순조.

그에 대한 수렴청정이 정순왕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정순왕후는 영조와 51년의 나이 차가 나는 계비이다. 그는 정조의 정학론과 달리 조정신료들을 노론 벽파 인물로 채우고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을 시작한다.


천주교 탄압의 이유는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나는 정서적 문제이고 다른 면은 정치적 차원이다.

조상에 대한 제사 문화를 부정하고 천주에 대한 기도만을 강요하는 것은 수 백년간 유교 생활에 젖어있던 대다수 조선인들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정치적 이유라 함은 주로 젊은 남인 계열의 학자와 지식인 사이에서 천주교가 전파되었는데, 노론 벽파에서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몰아 탄압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정적의 제거라는 이중적 효과를 노리게 되는 것이다.

1801년 신유박해는 종교적 탄압이자 정치적 정적 제거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정순왕후는 순조의 배필로 김조순의 딸을 간택하게 되고 이로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세도정치의 폐해는 한 가문에 의하여 국정이 좌지우지됨으로써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부패가 심각해지는 데 있다.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이에 따라 잇속을 차리고자 지위의 고하를 떠나 민초들에 대한 수탈은 그 도를 더해 간다.

삼정三政이라 일컫는 국가 세입의 골격은 토지의 결에 의하여 징수하는 전정田政, 장정현역병외의 장정에게 과하는 군정軍政, 봄에 곡식을 대여해주고 가을에 거두어들이는 환곡還穀인데, 그 부패의 실상은 아래와 같다.

전정의 경우 진결(陳結 황폐화되어 못쓰는 땅에 대한 징수), 은결(隱結 대장에서 누락된 전답에 대한 징수)등을 횡령하고, 정액 이상의 세를 과하는 도결都結도 있었다.

군정은 족징(族徵 도망자나 사망자의 밀린 납세금을 친족에게 물게 하는 것), 강년채(降年債 연로자에게 고의로 나이를 줄여 징수하는 것), 마감채(摩勘債 역을 면하게 되는 군포)등으로 착취하였다.

환곡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여 반작(反作  허위 문서와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 증우(增佑 상사가 명한 공정가보다 고가로 매출하는 것), 반백(半白 반분은 겨를 섞는 것), 분석(分石 겨를 섞어서 1석을 2석으로 불리는 것)등 여러 방법으르 중간 착취를 했다.

농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그들은 떼를 이루어 도적 화적 반란군의 형태로 정치궤도에 직접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홍경래의 난'이다.


한편 왕실에서는 정비의 몸에서 순조의 외아들인 효명세자가 태어난다. 그리고 1819년(순조 19) 세자가 11세가 될 때 부사직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니 풍양 조씨의 또 다른 세도정치가 예견되었다.

순조의 잦은 병치레로 효명세자는 19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한다. 효명세자는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결단력이 있어 조선왕조는 실로 오랜만에 성군의 통치를 기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 효명세자는 급사를 하게 되어 어쩔 수없이 순조가 다시 통치를 하게 된다. 이에 원손인 이환을 세손으로 정하게 된다.


1834년 순조의 환후는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여 11월 34년간의 치세를 마감한다.

보령 8세의 왕세손이 순조의 뒤를 이으니 이가 바로 헌종이다. 순조의 정비 순원왕후가 대왕대비의 몸으로 수렴청정에 나서게 되는 순간이다.

대왕대비는 안동 김씨이고 대비가 되는 헌종의 생모 신정왕후는 풍양 조씨로 이루어진 상황에서 헌종의 중전 간택이 관심사로 떠오른다. 결국 왕실의 웃전인 순원왕후의 뜻대로 김조근의 여식이 간택되고 안동 김문의 영달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헌종 9년 정비 효현왕후가 춘추 16세로 승하를 한다. 그리고 광산 김문의 김재청의 딸이 경빈으로 책빈된다. 헌종의 건강에 이상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즈음 경빈 김씨가 어렵사리 잉태하여 출산을 한다.

옹주의 탄생이었지만 이틀 만에 세상을 저버린다. 헌종의 정신적 충격은 그를 더욱 쇠약하게 만들고 더불어 조선 해안가에 수시로 출몰하는 이양선은 그를 심각한 피해망상으로 몰고 간다.

1849년 23세의 나이로 헌종은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8살 보령으로 즉위하여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으로 유년기를 보냈고 소년기와 청년기는 두 외척의 발호속에서 지냈다. 3정이 무너져 백성들은 도탄에서 헤어나지를 못했고 이양선으로 상징되는 서구 열강의 세력들이 해안 지방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왕위를 이어갈 후사를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P/S

1. 순조조 동안 백성에 대한 수탈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하였고, 관리들이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이미 죽은 사람(백골징포白骨徵布)과 갓난아이(황구첨정黃口添丁)의 이름을 군적에 올려 세금을 착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포를 감당할 수 없던 사람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기막힌 사건이 일어난다. 심지어 정약용도 애절양(哀絶陽)이란 노래를 만들었다.


갈밭마을 젊은 여인 울음도 서러워라

현문(縣門)* 향해 울부짖다 하늘보고 호소하네

* 현문;현감이 근무하는 관아의 문


군인 남편 못돌아옴은 있을 법도 한 일이나

예로부터 남절양(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했노라

*남절양; 남자의 생식기를 자름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말랐는데

삼대의 이름이 군적(軍籍)에 실리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도

범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里正)*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갔네

*이정; 지금의 이장 정도되는 직위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

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 <후략>


2. 천주교 전파에 있어 제사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심각한 사안으로 간주되고 있다. 중국에서 처음 전교를 하던 예수회에서는 그 나라의 풍습을 감안하여 제사제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풍습을 그대로 수용했었다. 뒤에 들어온 도미니크회와 프란시스코회에선 이를 엄격히 규정지으니. 서로 교리 상에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래서 바티칸에서 조상의 제사를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되고 말았다. 조선에서도 제사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였으며 수많은 생명이 순교든 희생이든 안타깝게 사라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변경이 된다. “전교지 나라의 문화 풍습을 존중하여 전교하라!”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없다.


                          -----조선왕조 500년 제 21 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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