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부 시월의 말
제6부의 제목이 ‘시월의 말’이다.
10월이면 가을이고 게다가 말을 언급하니 자연스레 천고마비(天高馬肥)란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로마 혹은 이탈리아에도 이런 표현이 있었나? 라틴 계열 언어를 전공한 나로서도 매우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의 말은 4마리 말이 끄는 전차들의 경주 대회에서 우승한 전차의 제일 우측 자리에 배치한 말을 의미하는데 이는 가장 빠르고 힘센 말을 뜻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경기장 트랙을 수 십 바퀴를 돌기 위해서 제일 우측 말은 다른 말보다 더 많은 거리를 같은 속도로 내야 하는 고로 당연히 주력이 가장 좋은 놈을 배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주대회가 끝나면 그 말을 10월의 말로 지정하여 神들을 위한 제물로 삼는다고 한다. 우리가 제사상에서 가장 좋은 과일과 음식으로 조상들께 바치는 것과 같은 맥락이리라.
불현 듯 떠오르는 것이 아주 오래된 [벤허]라는 영화에서 찰톤 헤스턴(유다 벤허역)이 경주 전날 자신의 경주마들에 다가가 하나씩 쓰다듬으며 속삭이던 대화 중 이런 흡사한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제목에서 드러난 것처럼 ‘시월의 말’이란 神을 위한 가장 훌륭한 제물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앞으로의 내용 전개를 위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제 5 부의 마지막 문장을 옮겨와서 6부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클레오파트라는 하는 수없이 멤피스로 도피하여 사제들의 도움으로 온갖 보물들을 챙겨 시리아로 건너간다. 그녀는 시리아 용병들을 모집하여 이집트로 출병하기에 이르고 이로써 이집트는 왕과 여왕사이에, 남편과 아내사이에, 누나와 동생 남매사이에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가 시리아에서 용병을 모집할 즈음,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 당도하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 일당은 폼페이우스 방문을 두고 심각한 고민을 한다. 그들은 이미 파르살로스 전투의 소식을 전해들은 바였고 이빨 빠진 호랑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는 것이다. 앞으로 실세로 등장하게 될 카이사르 편에 붙어야 이집트의 앞날이 편해진다는 판단 하에, 폼페이우스를 맞이할 영접 단 중에 고용된 자객을 섞어 넣어 폼페이우스가 해안가에 도착하자마자 주살하도록 한다. 그들은 이렇게 죽은 폼페이우스의 두골을 카이사르를 위해 바칠 선물로 고이 보관하기로 한다.
폼페이우스는 이렇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피케눔 출신으로 집정관을 지낸 바 있는 아버지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금수저 아들로 태어나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이 평생을 승승장구해온 그였지만, 하늘 아래 가장 패기만만했고 오만하기 짝이 없었던, 심지어 자신의 코그노멘을 '위대한'의 뜻을 가진 '마그누스'로 스스로 부여했던 당대의 영웅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갔다.
이때 카이사르 나이 52세였다.”
폼페이우스와 그의 잔당을 정벌하고자 이집트에 온 카이사르에게 프톨레마이오스 왕 일행은 폼페이우스의 잘려진 머리를 선물인 양 바친다.
이를 본 카이사르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격노하게 되는데, 폼페이우스를 굴복시키되 앞으로 그와 함께 분열된 로마의 단합과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이 무산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카이사르와 프톨레마이오스 왕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로마가 이집트와 우호 관계로 갈 것인지 아니면 이집트를 굴복시켜 합병할 것인지 예전부터 문제시 되던 사안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이런 와중에 카이사르는 뜻밖의 비밀스런 선물을 받게 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양탄자에 둘둘싸인 채로 등장하는 클레오파트라의 나신(裸身)이었다.
이집트 지배를 위하여 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와 전쟁 중에 있던 클레오파트라로서는 문자 그대로 몸 바쳐 일생일대의 도박을 건 최후의 승부수를 던질 수밖에 없었던 바였다.
실제 클레오파트라는 매부리코에 가냘픈 몸매를 지닌 22세의 소녀 같은 인상이었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그녀의 매력에 빠진 것은 지적인 대화와 정치적 감각에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두 사람은 클레오파트라가 라틴어를 몰랐기에 그리스어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람어는 물론 동방 국가들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재능과 영민한 두뇌의 소유자였기에 카이사르에게는 색다른 매력을 어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렇게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가 한 편이 되자 프톨레마이오스 왕과의 일전은 회피할 수 없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수적 열세와 지역 사정의 무지, 그리고 카이사르의 뇌전증(간질)의 발병 등으로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지만 결국 카이사르의 승리로 프톨레마이오스는 익사하게 되고 이집트의 정권은 클레오파트라의 손에 쥐어진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머물면서 이집트의 풍족함과 파라오를 통한 통치체제에 대한 견문을 쌓고 로마로 돌아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내전의 상흔을 치유하고자 한다.
당시 이집트는 종교적 관념으로 인간 사 모든 것이 좌지우지 되고 있었는데, 왕족의 혈통을 잇기 위하여 같은 가족 내에서만 결혼이 이루어져야 했고 특히 남매간의 결합을 최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와 결합한 것은 실제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오리시스 신이 환생한 현신으로 간주하였으며 그렇기에 그와의 결합은 당연한 것이자 그의 혈통을 받은 후세를 낳는 것이 여왕으로서의 가장 큰 책무라 여겼다. 카이사르가 로마를 떠날 당시 그녀의 몸에서는 카이사르의 후손이 자라고 있었고 후에 태어난 아들이 카이사리온이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가 어린 카이사리온을 데리고 로마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는 카이사르를 통하여 또 다른 혈육(공주)을 잉태함으로써 카이사리온의 배필을 만드는 이상적 결합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면에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는 영웅과 여왕이라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만 볼 것이 아니라 당시 국제 정치, 외교적 측면과 함께 이집트의 종교적 관습적 행태를 복합적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
로마로 귀환한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통하여 종신 독재관의 지위에 오르게 되고 이는 王과 다름없는 절대적인 권력을 쥐게 된다.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는 예전 독재관 술라가 공권박탈이라는 명목으로 정적에 대해 가차 없는 탄압을 일삼은 것과는 달리 관용과 포용의 정책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원로원의 정원 수를 1천 명으로 늘려 재판 배심원과 법무관을 증원하여 뇌물 및 살인 강도 폭력 등 사회범죄에 대한 신속한 법정 심리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그리고 속주에 대한 수탈을 방지하고자 총독과 사업가들의 부당취득을 금지하고,
귀족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하여 운영하고 있는 대농장 라티푼디움을 국가가 개입하여 퇴역 병사들에게 배분하는 토지개혁을 진행한다.
그리고 계절과 달력의 부조화에 따른 병폐를 일소하고자 이집트에서 도입한 율리우스력을 전격 시행토록 한다.
그리고 민중에 대한 무상곡물법을 제정하여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을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더불어 절대 권력과 민중의 지지를 한 몸에 지닌 카이사르는 동방 부유한 국가인 파르티아 정벌을 감행함으로써 전리품 획득과 함께 크라수스에 대한 복수에 나서고자 한다.
기원전 44년 동방 정벌 준비에 한창이던 56세의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 23인으로 구성된 암살단에 의하여 갑작스런 죽음을 당하게 된다.
카이사르의 죽음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질투만큼 눈을 흐리게 만드는 것은 없다”라는 말로 대신하고 싶다.
암살단 23인 구성원의 대다수는 갈리아 전쟁부터 루비콘강의 도하로 시작된 내전까지 카이사르와 전장을 함께 누린 역전의 용사들이거나 폼페이우스 편에 섰다가 카이사르로부터 사면을 받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트레보니우스와 테키무스 브루투스는 전자에 해당하는 인물들이고,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등은 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들은 하나같이 파트리키 귀족 가문이었으며 모두가 집정관을 향한 야망이 가득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카이사르 독재 체제 하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줄어들자 그 모든 원인을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그를 제거하는 것만이 그들에게 더 많은 출세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카이사르를 암살한 후 스스로를 로마를 압제에서 구한 해방자라고 명명하였으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자 하였다.
허나, 민중의 반응은 시간이 흐를수록 카이사르에 대한 애도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오히려 그를 신격화하기에 이르렀으며 심지어 해방자들에 대한 테러가 자행되기도 한다. 급기야 하나 둘 로마를 탈출하여 망명의 길을 떠나 속주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한다.
당시 로마에서 카이사르와 함께 머물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또한 자신의 왕국 이집트로 쓸쓸히 귀향하게 된다.
이때부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역사의 한 장면을 이루는 주요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6촌 형인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외조카로서 율리우스 집안의 피를 이어받은 몇 안되는 혈족 중의 하나였고 직계자손이 없던 카이사르였기에 그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인물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함께 숱한 전장을 함께 누비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군으로서 나름 명성이 높았으나 방탕한 기질로 낭비를 일삼고 무계획적인 생활로 카이사르의 신임을 얻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그리고 카이사르 사후 그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그의 생질손인 옥타비아누스를 입양하여 카이사르의 대를 잇도록 한다.
2. 전 재산의 8분의 7을 옥타비우스에게 상속하고 나머지 8분의 1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외 몇몇에게 분배한다는 것이다.
공공연하게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하던 안토니우스에게는 정작 권력은 커녕 단 한 푼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카이사르 다운 유언이 아닐 수 없다.
옥타비아누스는 누구인가?
그는 카이사르 외조카의 아들이니 생질손이 된다.
카이사르와의 교류는 많지 않았으나 옥타비아누스의 영민함과 특출함을 한 눈에 알아본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분란 토벌에 동반하도록 하면서 그의 자질을 눈여겨 봐왔다.
옥타비아누스는 선천적으로 천식을 앓고 있던 병약한 17세 소년이었기에 그누구도 그가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로마는 또 다른 격변의 시기로 빠져든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반발은 예견된 수순이었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의 대립은 물론 로마를 떠난 해방자들의 세력으로 로마는 삼분(三分)되어 매우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된다.
안토니우스와 대립하고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또 다른 주축 세력인 레피두스에게 삼두연합을 제안하여 카이사르를 암살한 해방자 세력을 우선적으로 타도하는데 상호 협력하기로 합의한다. 이를 제2차 삼두체제라 부른다(제1차 삼두체제는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가 맺었던 합의이다. 제 4부 참조).
삼두연합 세력은 이탈리아 갈리아에 진을 치고 있던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먼저 격파하고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자결하기에 이른다.
다음으로 동방으로 건너가 가장 큰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의 세력을 필리피 회전에서 대파함으로써 소위 해방자들의 반란에 종지부를 찍는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자신의 코그노멘을 카이사르로 바꾸고 심지어 그의 말투와 몸짓도 따라하는 등 카이사르의 이미지를 그대로 계승하고자 한다.
카이사르의 막대한 재산과 후광을 등에 업은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약점인 신체적 병약함(천식)을 정신력으로 이겨내면서, 여유를 갖고 안토니우스 제거를 모색하기로 한다. 그럼으로써 카이사르가 남긴 미완의 과제들을 하나씩 수행해간다.
"승리의 아픔이란 전쟁의 유일한 생존자로 남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옥타비아누스는 유일한 생존자가 아니라 오히려 원대한 꿈을 향해 본격적으로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P/S
1. 카이사르와 키케로
서로의 실력과 탁월함을 상호 인정하면서도 정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 업력을 쌓는다.
카이사르는 전훈과 카리스마 그리고 대중을 위한 서민적 정책으로 인지도를 높이는 한편, 키케로는 달변과 훌륭한 논문을 통하여 자신의 박식함과 지혜로써 자신의 명성을 높여간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깨어진 결정적 사건의 계기는 키케로가 저술한 [카토]였다. 카토는 카이사르와 평생의 정적으로서 아프리카에서 자결할 때까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은 스토아 철학의 신봉자였다. [카토]는 카이사르에 대한 비난 일색이었는데 이로써 두 사람은 돌아올 수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카이사르 사후 키케로는 안토니우스와 맞서다가 안토니우스의 수하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참수는 물론 달필이었던 팔도 잘리고 심지어 입안의 혀까지 추출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키케로의 업적과 평가는 스티븐 세일러의 작품 [로마 서브 로사]에서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2.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브루투스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 [줄리어스 시저]에서 남긴 유명한 말 "브루투스 너 마저..."라는 귀절은 작가의 창작물이지 어떠한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기의 말은 생명력을 가지기에 혹자는 동 브루투스는 마르쿠스가 아니라 데키무스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두 사람 다 왕정을 끝내고 공화정의 수립에 절대적 기여를 했던 브루투스 가문의 후손들이지만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장군이었고 핵심 참모 중 일인이었으며 카이사르의 유산 중 일부를 상속받기도 하지만 카이사르가 가지는 특별한 감정은 마르쿠스에 비견할 바가 아닐 것이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 평생의 연인 세르빌리아의 친아들이다. 세르빌리아가 카이사르의 딸 테레니아를 낳게되자 마르쿠스는 테레니아의 이부 오라버니가 된다.
카이사르와의 관계가 묘하게 되고, 그 이전에는 카이사르의 친딸 율리아와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맺었으나 카이사르가 삼두체제의 완성을 위해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정략결혼을 시키는 바람에 크나큰 실연의 상처를 입는다. 카이사르 내전 동안 그는 폼페이우스 편에 들었다가 패전후 카이사르로부터 사면을 받아 목숨을 구한다. 물론 세르빌리아와의 관계에 따른 것이었으리라...
한편 가이우스 카시우스는 세르빌리아가 낳은 카이사르의 딸 테레니아의 남편이다.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제부가 되고 카이사르를 장인으로 모셔야 되는 관계이지만 그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카이사르의 암살에 앞장선다.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없는 것이 권력이란 말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리라.
3.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
미술학도들에게 매우 익숙한 석고상 중에 아그리파가 있다. 그의 이름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이고, 카이사르는 물론 모두가 인정하는 대로 남자답게 잘 생기고 골격도 훌륭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로서 옥타비아누스의 계략과 지혜를 십분 이해하여 실행에 옮기는 충직한 핵심 인사로 활약한다.
4. 동 작품의 저자 콜린 매컬로는 제6부로써 그의 역작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과 로마사에 있어 옥타비아누스가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여 비록 신체적으로도 힘들고 탈진한 상황이었지만 작가는 제7부의 집필을 강행하게 된다. 아직도 매컬로의 로마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제6부 시월의 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