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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Sep 02. 2024

계도기간


지하철을 탔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줄곧 휘청이는 손잡이를 부여잡고 서있었어. 에어컨이 뿜어내는 찬바람은 내 손목과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며 너의 향수 냄새를 진하게 풍겨. 동시에 나는 눈을 꾹 감고 말아. 잃어버린 네가 머무는 곳은 어딜까. 나는 언제까지 깊은 공허 속에 갇혀야만 하는 걸까.


며칠 전에는 한 친구를 만났어. 우린 카페에 앉아 저 멀리에 있는 산이 선명히 보이는 걸 기뻐했지. 오늘은 분명 날씨가 맑다며 말이야. 나도 고개를 끄덕였어. 새삼 형체가 분명한 땅 위에 발을 딛고 서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


그러던 중, 그 애는 갑자기 고장 난 무언가에 대한 특징을 나열하기 시작했어. 설명은 이내 끊임없이 이어졌고 고장에 대한 설명들이 도미노처럼 쌓여서 결국에는 나의 코앞까지 다가왔어. 그때였을 거야. 툭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거. 손도 아니고, 발도 아니고, 단지 한 줌의 숨이었어. 그 애 말이 맞다면 나 역시 고장 난 것 같아.


한강을 걸었어. 오늘도 역시 혼자였어. 강바람이 나를 철썩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꼬여버린 실뭉치처럼 얼굴을 괴롭혀. 그럼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머리를 질끈 묶고 말아. 그러다 문득 강바람에 대해서 생각했어. 강바람은 두툼한 것 같아. 그래서 자주 찾는데 그만큼 자주 짓눌리나 봐. 나는 요즘 왜 이렇게 헤매는 걸까.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만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거야.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아. 아무리 걸어도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들지 않아. 내가 매일매일 걸어 다니는 이 길, 내가 매일 바라보는 이 강변, 매일 보이는 하늘과 물결. 모든 것이 멈춰서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아. 나는 여전히 네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그저 막연하게 너를 찾아 헤매는 이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 그래서 나는 자꾸 땅따먹기를 하듯이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는 거야. 분주한 발걸음으로.


걷다가 현수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어. 불법 노점상 계도기간. 얼마나 더 이런 불법적인 것들이 계속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 문구가 지겨울 정도로 오래 걸려 있다가 결국 떼어지게 되면, 그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 다만 땡볕 아래 손목에 채워져 있던 시계라거나, 오랜 시간 손가락 틈새를 벌리던 반지가 사라진 뒤처럼 속살은 하얗게 타지 않고 다만,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그렇다면, 나와 꼭 겹쳐져 있던 네가 사라진 자리에는 뭐가 남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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