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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Sep 11. 2024

19시 45분


 19시 45분. 손목시계는 여전히 그 시간에 멈춰 있다.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세계. 초록불로 바뀐 신호등에 발걸음을 옮기던 사람, 사랑스럽게 서로를 마주치던 눈빛도 모두 정지한다. 시간은 이제 그들의 것이 아니다. 오로지 나만이 자유롭게 남은 이 세계에서 걸음을 뗀다. 막다른 벽으로 둘러싸인 거리의 끝, 어두운 구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검고 깊은 구멍. 나는 그곳으로 다가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이 뒤집힌다.

 구멍 속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 그들이 살아온 조각들이 내 주위에 흐릿하게 떠다니고 있다. 기억들은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있지만, 내 살과 닿는 순간 나는 사람들의 과거를 내 맘대로 바꿀 수 있다. 다시 써 내려가는 것이다. 나만의 방식으로.

 오늘은 자판기 아래 쪼그려 앉은 남자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누군가와 격렬하게 다툰 뒤돌아서는 장면에서 멈춰 있다. 그의 미래는 이제 내가 만들어준 기억에 따라 바뀔 것이다. 나는 결과를 알지 못하지만, 다툼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어차피 기억이란 특정 인물 안에 갇힌 허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겠지. 내가 결정하는 순간 그것이 그들의 진실이 되니까.

 다음은 나의 차례다. 나 자신에게도 구멍 속에서는 전지전능한 힘이 주어진다. 나는 그동안의 기억을 되돌아본다. 잊고 싶었던 순간들, 고통스러웠던 대화들, 내게 상처를 준 얼굴들. 나는 그 기억들을 쥐고 필오프 팩을 벗기어내듯 천천히 뜯어낸다. 그리고 새로운 기억을 그 위에 덧붙인다.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그들은 멈춰 있고, 나만이 움직이며 그들의 과거를 다시 쓴다. 그렇다고 해서 늘 좋은 기억만을 심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더 어두운 색으로 덧칠한다. 내게 고통을 주었던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는다. 전지전능한 신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계속해서 이 구멍 속으로 들어와 기억을 조작하고 있지만, 여전히 19시 45분이면 이곳으로 돌아오고 있다. 기억은 매일 생성되니까. 다시 쓴 이 기억들은 과연 나를 바꾸었을까. 매일 반복되는 19시 45분의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우면서도 그 누구보다 갇혀 있었다. 타인의 과거는 내 손으로 다시 써졌지만, 나의 과거는 흐르지 않는다. 돌아가는 길을 잃었다.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이 구멍 속에서 목소리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것은 나였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데?”

 그때 깨달았다. 연필을 쥔 채로 줄곧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었다.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고, 그 결과로 현실의 나를 잃어버렸다. 더 이상 구멍을 통해 무언가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이제 나가자.”

 목소리는 다시 한번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공들인 기억은 결국 허상일 뿐이었다. 진실은 구멍 바깥에 있다. 그제야 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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