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아, 벌써 구월이야. 하루를 한 장씩 모았더니 제법 무거워졌어. 그래서 나뭇잎도 툭툭 떨어지는가 봐. 당연한 이야기가 당연해지지 않는 너와의 시간이 좋았어. 너 만나러 근처까지 갔는데 연락은 하지 않았어. 대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네가 걸었을지도 모를 길들을 한참 걸었어.
등 뒤로 땀이 조금 맺히고 어떤 다리 위를 건널 때는 사람들이 남긴 말들을 읽었어. 내 손바닥 폭이 좁다는 건 너도 잘 아는 사실이겠지, 나의 손바닥 정도 되는 난간 같은 게 누군가에게는 편지지가 되더라. 네 줄을 꽉 채워서 가엾음에 대한 연민을 적어둔 거야. 나는 그 연민이 훼손의 성격을 띨지언정 이름 모를 이가 얼마간 그곳에 멈추어 서있었을까 짐작해 보았어. 아마 좁은 곳에 쓰기 위해 손목에 힘을 주느라 뻐근해지지는 않았을까.
너의 입술이 우리의 추억을 말해줄 때마다 조금 괴로워. 실은 나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어. 너랑 있을 때 나눈 대화들을 고이 간직하고 싶은데 자꾸만 머리가 지끈 아파와. 누군가 기억의 이음새를 싹둑 잘라버린 것 같아. 괴로운 건 기억의 공백이 생생하다는 사실이야. 루밍이라는 파아란 물고기가 떠나고 빈 어항을 한동안 치우질 못했던 때처럼 말이야.
몇 년 전에 찢어진 청바지가 유행이라고 내가 가위질을 하고 사포로 멀쩡한 바지를 긁어댄 적이 있었어. 그건 해져도 자기들끼리 꼭 붙잡고 있었거든.
그때의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어쩌면 재생되면서 곪은 것이 떨어져 나간 건 아닌가. 그러면 지금의 나는 행복한 거야? 결국 나는 내가 아닌 누구도 답해줄 수 없는 것들을 찾는 거야. 네가 아닌 누구도 답해줄 수 없는 것들을.
그러니까, 견아. 혹시라도 마주치면 싶어서 옷도 예쁘게 차려입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