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멈칫하고 만다. 기껏 해봐야 디지털 상에 남은 파일 하나를 없애는 일일 뿐인데, ‘삭제’라는 단어는 매번 마음 어딘가를 뾰족하게 찌르곤 했다. 세상이 참 쉬워졌다. 삭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기록은 아주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사라진 자리는 의외로 더 어수선해진다. 삭제가 남긴 자국들로 자잘한 공백들.
나는 ‘예’ 버튼을 누른 뒤로 한참을 화면만 쳐다본다. 기록을 남기고, 기록을 지우는 일은 결국 미련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남기는 이유도 미련이고, 지우지 못하는 이유도 미련이다. 기록되지 않은 것들은 내면의 한 귀퉁이에 가라앉아 윤곽만 흐릿하게 남는다. 원본은 이미 사라져서 기억에만 의존하게 된다.
친구는 대화를 멈추더니 메모장에 정신없이 타자를 쳤다. “야, 잠깐만. 방금 얘기 좀 적을게.” 그 모습이 나와 너무 닮아 우스웠다. 우리 둘은 같은 ‘기록 변태’였으니까. 우린 사소한 것에 열광했고, 사소한 것을 남기려 애썼다. 그리고 남긴 순간에는 이미 그걸 잃어버리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기록을 남기는 게 아니라, 기록에 갇혀 버린 건 아닐까? 사소한 대화나 문장에 열광했던 만큼, 그 순간도 기록만 남기고 결국 지나가버렸다. 차곡차곡 쌓아 놓기만 한 기억들, 정작 들춰본 적은 몇 번이나 있었을까? 나는 한동안 메모장이나 사진첩을 열어보지 못했다. 지우는 건 더 어려웠다. 그날의 나를 완전히 잊어버릴까 봐 두려웠던 걸까.
신호등을 건너다 ‘안전제일’이라는 표지판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발걸음을 더 조심스레 떼던 나를 떠올렸다. 너무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마는 습관 때문에 가끔은 거리의 표지판이나 전광판에까지 내 이야기를 읽어내곤 했다.
‘용량이 부족합니다’라는 알림이 뜨지 않았다면, 아마도 여전히 무겁고 커다란 기억의 짐을 안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지우는 일이 필요했다. 지우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남는 게 있었다. 삭제 후에도 느껴지는 그 자리에 대한 어렴풋한 그리움. 기껏해야 데이터 정리일 뿐인데도, 미련이란 뜻밖에 깊이 남아 있는 듯했다.
파일을 모조리 지운 후, 자꾸 뒤돌아보았다. 지운 기록의 자리를, 지우기 전에 어떤 일들이 거기 있었는지를 생각하며. 새로운 파일들이 그 자리를 채워가겠지만, 남겨진 공백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 공백들이야말로 진짜 기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이란 건 남고 싶어도 남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아닐까. 결국, 흔적을 남기는 일은 계속 지워가야 하는 일의 연속이다. 지우고 또 남기고, 남기고 또 지우면서도. 그 과정에서 어딘가에 새겨지는 작고 옅은 것들. 그 미세한 무늬들이 결국 나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광활한 공백이 펼쳐졌다. 또 다른 흔적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비슷한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문장을 다시 써서 게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