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우울감에 글을 적는다. 힘든데, 참. 그게 힘든데. 글은 써진다. ‘적당한’ 우울이 뭐길래. 우울이 나를 잡아먹지는 않을 정도? 요즘도 하루가 짧다. 어느새 추워지기 시작했다. 어제는 반팔을 입었는데 나 혼자만 그 차림새였다. 그래서 금방 집에 들어왔지. 확실히 가을이다.
올해는 이상하다. 여름이 정말 더웠는데 여름이 가고 나니까 조금은 아쉬운 것 같다. 오늘도 물길을 걷는다. 적당히 다리가 아프기 직전까지 아주 오래 걸었다. 사람들이 참 예쁘다. 어둠에서도 빛나는 눈동자며, 소음을 뚫고 서로 목소리를 듣기 위해 기울이는 고개며. 그래도 역시 혼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눈길이 갔다.
걷던 와중에 무식하게 높이 쌓은 탑을 봤다. 빛은 빛인데 사람 눈과는 다르다. 갈수록 자연스러운 게 더 좋다. 어제 먹은 보리밥과 나물, 청국장도 그랬지.
결국에는 내가 지우지 못한 순간들이 나를 만드는 것 같다. 지울 수 없는 순간들은 돌연한 지점을 기어이 가지고 있다. 어딘가 평범하다기보다는 어긋나 있거나 뒤틀려있고, 마침내 그 순간이 남아있는 건 그러한 지점들 때문이지 않을까.
오늘날은 언젠가 어떤 순간으로 남게 될까. 글을 쓰기까지 오래 걸렸다. 세 시간 정도 걸으며 떠오른 문장들. 생각보다 건진 건 없나. 더 덧붙이고 정돈하는 방법도 있는데,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므로 오늘은 조금 쉬어가고 싶다. 자정까지 맥반석 구이오징어와 맥주 한 캔 먹으며 영화 한 편을 봐야겠다. 요즘 맥주랑 친해졌다.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오롯이 견뎌내기. 외로움을 비롯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