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서점에서 사 온 시집을 읽다가 모서리가 찢긴 페이지가 있길래 북마크를 해두었다. 단지, 그 이유다. 빛바랜 흔적들이 좋다. 사람 냄새가 나서 오래오래 해묵은 종이에 코를 박고 킁킁거릴 때가 있다. 맨 앞 페이지에 수희에게로 시작하는 글이 남겨진 책도 구해온 적 있다. 수희 씨는 어쩐 일로 이 책을 내놓게 되었으려나. 그리고 본인의 이름을 이니셜로 표기해 두었던 그이의 이름 석자는 뭐였을까. 어쩌면 외자 이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누군가에게 써서 건넨 글들도 세상을 돌고 있거나 돌게 되지는 않을까. 조금은 괘씸하기도 할 것 같은데, K 씨가 이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나랑 비슷하게 생각할지도 궁금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에너지드링크가 따로 필요 없었다. 각성, 너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는 계속 계속 새벽마다 깼다. 너는 나보고 벌써 일어났냐고 했고 나는 네 연락을 더 일찍 보고 싶었기 때문에 눈이 저절로 뜨였다. 꿈은 반대라는데, 너랑 손. 겨우 손등이 스치는 꿈을 꾼 날에는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았다. 내가 만든 초콜릿을 네가 전부 먹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는, 빌어먹을. 다시는 초콜릿 같은 거 안 만들겠다고 생각도 했다. 양손 가득 장을 봐와서 꼬박 새벽을 샌 것도 모르는 너는 그게 참 쉬웠겠지. 나쁜 자식. 가는 신호마다 다 코앞에서 빨간 불로 바뀌어버려라. 여분으로 만들어둔 초콜릿을 냉동실에 처박아 두었다. 단 거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거 알았을 때 조금 기분이 풀린 내가 싫었다.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해 버리는 거 정말 별로다, 별로. 그래 나 별로인 인간이다.
내 손을 떠나 네 손으로 건네지는 것들.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결정의 자유는 너에게 있다. 결정을 존중해주어야 하는 게 맞는 것도 안다. 그래도 아직은 <K 올림> 세 글자 위를 검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짚어보는 일이 나에게는 더 맞나 보다. 수희 씨, 미안. 나는요, K 씨의 안부가 더 궁금합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진심을 들여다보는 일이 가능하다는 건 뭐랄까, 아주 은밀해서 보물을 발견하는 느낌. 누군가에게는 슬픈 사연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바닷가에서 유리병에 표류해 온 편지 한 통을 발견한 것 같다. 시간과 일화를 어림짐작해 보는 거, 찬란하게 아름답고 아름답기에 슬프다.
새벽이 깊어질수록 밤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멀리서 바람소리가 울리던 때에 네가 떠오르는 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정도 거리를 유지했지. 닿을 듯 닿지 않는 손등의 간격처럼. 그때는 그게 지켜야 할 무언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경계가 무엇을 의미했는지조차 모호해졌다. 불완전함마저도 우리 관계의 일부였던 것 같다. 너와의 서사 속에서 불가피한 결말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나 역시 누군가의 유리병 속에 담긴 채 표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책 한 권 그것도 한 장에 적힌 누군가의 필적이 이렇게나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보면. 나와 당신들의 이야기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누군가의 손에 닿을 날이 올까. 그때 나는 어떤 기분일까. 당신이 생각해내지 못한 순간들까지도 타인이 알아채고, 거기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게 될 때, 한편으로는 그 낯섦이 기대되기도 한다. 우리네들의 흔적이 세상 속에서 재해석되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 시간의 흐름이 모든 걸 덮어버리지만, 그 속에서 우연히 펼쳐지는 순간들은 아주 값지지 않을까.
내가 건넨 진심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가게 되었을 때 그 아무개 씨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조금 더 많이 진심을 표기하여 나누어 봐야겠다고 다짐하는 밤이었다. 나는 손끝으로 자꾸만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 누군가에게 이해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 이해가 전달된다는 것. 그걸로 충분하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건, 소리 없이 닿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존재하지만 흔적은 미세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렇지만 그걸 알아채곤 하는 걸. 작은 사실들이 한 조각으로라도 남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