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유 Nov 13. 2024

새벽의 시작으로 전환



 밤은 언제나 창가에서 시작하네요. 지난날의 기억이 참 희미하죠. 뭔가를 붙잡고 싶지만 이미 사라진 것들이라, 손끝에 닿는 건 공기뿐이에요. 그래도 잊을 순 없어요.


추억이란 참 이상한 거예요. 밝았던 날들은 나도 모르게 가라앉고, 쓰렸던 순간들이 오래도록 떠다니거든요. 나는 그것들을 피하려고만 했는데, 결국엔 다시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어요. 꼭 이 밤처럼요. 별빛은 조용하죠. 그런데 그 빛 아래에선 모든 게 드러나는 것 같아요. 숨기려 했던 것도, 애써 묻어둔 것도요.


 기억이 늘 저만치 멀어져 가요. 내가 아무리 따라가도, 손을 뻗어도, 한 발자국씩 더 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일까요, 기억들은 언제나 눈앞에 있는 것보다 선명해요. 과거는 다 흘러간 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오늘 속에서 불쑥 고개를 들지요. 참 이상한 일이에요.


 참 많은 걸 지나쳤어요. 멀리 보이는 불빛들, 한밤중에 들리는 작은 소리들, 그리고 고요한 그리움 같은 것들이요. 하지만 지나갔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다들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죠. 언젠가 다시 꺼내보게 될 날이 있겠죠. 그날이 올 때,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나였으면 좋겠어요.


 밤은 어쩌면 모든 것을 잊게 하려고 존재하는지도 몰라요. 창문 너머로 밀려드는 어둠은 숨기고 싶은 것들을 가만히 감싸줘요. 바람이 스칠 때마다 무언가 떠오르다가도 이내 흩어져요. 어쩌면 그게 밤의 방식이겠죠. 담아두고 싶어 했던 것들, 지워야 했던 것들을 모두 뒤섞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흘려보내는 거요. 하지만 가끔은 붙잡아보고 싶어요.


 어떤 기억들은 참 끈질기죠. 참 오래 나와 함께한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요, 가끔은 내가 기억의 일부가 된 기분이 들어요. 내가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나를 이끌고 있는 느낌이요.


 밤이 참 길어요. 아침이 오면 어김없이 끝나겠죠. 그러니까 조금 더 걸어봐도 괜찮겠네요.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를지도 모르니까요. 다만 혹시나 잊더라도, 언젠가 다른 밤이 다시 나를 불러주겠죠. 그리고 그때는 이 순간의 의미를 조금 더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매거진의 이전글 밤의 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