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화는 어떻게 지켜지는가
요즘은 한국 언론 매체에서도 가끔 ‘시청 주의’표시를 보곤 한다. 하지만 그것도 공중파 정도는 되어야 그런 점잖은 경고를 볼 수 있는 정도다. 미국에서 여러 시청각 매체를 접하다 보면 자주 만나는 표현이 있다. ‘disclaimer(미리 알려두기), viewers’ discretion needed (시청 주의), it includes uncomfortable image/story. For those who has trauma…(트라우마를 촉발할 수 있는 장면/이야기가 있음)’ 같은 것들이다. 보는 사람이 놀라 당혹하거나 상처받지 않게 미리 배려하는 경고문을 써놓는 것이다.
이걸 보면서 떠오르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어느 한국 유투버가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에게 한국 드라마 시청 소감을 물어봤다. 의당 케이드라마 너무 좋다면서 완전 푹 빠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스토리가 뻔하다고 신랄하게 간파한 사람도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의 답변이 내 주의를 끌었다. ‘너무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아침 드라마를 주로 본 모양이었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뺨 때리기, 혹은 재밌다고 생각하는 김치 싸대기 같은 장면 치고받고 머리채 잡고 싸우는 장면, 그런 걸 본 거 같다.
내가 대학 1학년때 5월이었다. 학교 안에는 ‘민주광장’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5.18 광주 민중항쟁’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대뜸 보게 된 사진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말로 설명하기 끔찍한 사진이었다. 사진전의 의도가 대체 뭔가 싶었다. 대의야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방법이 틀렸다. 너무나, 너무나 폭력적이었다. 그렇다. 우리 일상은 개개인의 섬세한 감각쯤이야 얼마든지 무시하는 폭력불감증으로 물들어 있었다.
미국 대학원입학시험 공부를 하면서 배운 미국식 글쓰기에서는 두괄식으로, 모든 대명사를 쉽게 유추할 수 있게 명료하게 쓰라고 배운다. 6하 원칙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나도 학교 글쓰기 연구소에서 도움받기를, ‘모든 인종, 모든 문화, 다양한 학력 수준, 비전공자’까지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더는 궁금한게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글을 쓰라고 배웠다. 단지 5060 백인남자 대학교수들만 상대로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인클루시브 랭귀지Inclusive Language 즉, 포용적 언어란 인칭대명사를 he/his/him으로 쓰던 것을 she/hers/her로도 써보라는 것이다. 신학에서는 특히 God himself, Him등을 Godself로 쓰라는 말이었다. 기독교의 신은 무성이기 때문이다. 관용어구라도 소수자집단이 상처받지 않도록 잘 걸러서 표현해야 한다. 예컨대, 한글 개역판 성경에 있는 ‘문둥이, 귀머거리, 벙어리’같은 말을 한센병 환자, 청각 장애인 등으로 바로 쓰라는 것이다. 누구도 상처받거나 소외되지 않고 존중받는 글쓰기를 하라는 말이다. 거기서부터 개인주의와 사람존중이 시작된다.
뉴욕타임스 기사를 보면 일단 한국 기사 보다 훨씬, 훨씬 길다. 이어지는 기사더라도 다시 6하 원칙에 근거해 설명해준다. 한국 기사는 일단 짧다. 설명보다는 생략이 많다. 오타도 많다. 담긴 정보도 어디 인터넷 게시판 긁어 쓴 거 같다. 읽는 사람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행태다.
미국살이가 한국보다 단순하고 편리하다. 그것은 높은 문맹률, 낮은 대학 진학률 탓도 있고 다문화 사회인 탓도 있어서, 모든 절차가 단순하고 명료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운전면허를 딸 때의 이야기다. 주마다 인구가 많은 소수민족 언어로 필기시험 정도는 칠 수 있게 해 놓기도 한다. 시험장엘 가니 운전면허 관련 안내문이 읽기 좋은 글씨 크기로 써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만일 이 안내문이 어렵게 느껴지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반드시 알려주세요. 고치겠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미국은 한국처럼 영어 오래 공부한 사람도 못 알아먹을 영어단어를 정부 정책에 쓰거나, 이공계 전공자들이나 알아먹을 설명을 써놓거나, 그런 기능을 만들어놓거나 하지 않는다.
애틀랜타의 한 대학에서 공부할 때다. 학교 한가운데에 네모난 잔디밭인 쿼드랭글quadrangle이 있고 그 옆에 학교 예배당이 있다. 처음에는 개신교 예배당이었겠지만, 이제는 모든 종교가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놨다. 그래서 십자가가 걸이식이다. 신학교 주중 예배는 수요일 오후에 한 번씩 있다. 그 예배에서 사용하는 주보를 보니, 찬송가 저작권 허용 번호부터해서, 인용된 모든 문학작품 출처, 작곡자 이름, 참여한 사람들 명단이 세세하게 한바닥 써 있었다. 우리가 다녔던 성공회 교회도, 예배 전후 배경음악이 되는 곡들 이름, 작곡자, 작사자 모두 세세히 써있었다. 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모든 정보가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제공되어 있었다. 한국 개신교회 주보는? 헌금자 명단이 한바닥 써있다. 영수증 대신이란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한 마지막 만찬을 재연하는 성찬예식도, 예수의 살을 상징하는 빵은, 내가 다녔던 대학 채플에서는 빵이 글루텐프리라서 레시피가 적힌 카드까지 있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붉은’ 포도주대신 백포도주를 쓰고, 알콜중독자와 청소년을 위해서 포도주스가 함께 제공되었다. 모든 감각을 섬세하게 대했다. 그렇게 해서 지켜지는 것은 개개인의 peace of mind, 즉, ‘마음의 평화’였다. 내가 온전히 인정받고 신중하게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오니, 가장 어색한 것 중 하나가 바로 6하 원칙이었다. 아니 도대체 지자체 행사 포스터에도 6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서, 주최는 누군지, 그래서 이 행사를 도대체 어디서 몇시부터 몇시까지 한다는 건지, 문의처는 어딘지, 기본 정보가 빠진 포스터를 한 두 번 본게 아니다. 교육기관을 포함해서, 모든 일의 안내가 다 그런 식이었다. 병원에 가면 더 문화적 차이가 컸다. 미국에서는 의사가 문진을 찬찬히 하고, 병명이나 증세, 예후에 대해 상세히 일러준다. 물론 내 정보는 '주치의 제도'를 통해 미국 와서 첫 발 디딘 병원서부터 여기 저기 옮겨 다녀도 의사가 내가 처방받은 내용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애를 데리고 병원엘 가니, 웬 기계같은 의사가 앉아서 기계처럼 정해진 말만 속사포로 쏟아내고 그저 빨리빨리 내보내기에 바빠서, 나오고보니 병명조차 정확히 안 알려주기도 했다. 각이 안 잡힌 두루뭉수리한 언어가 공중을 둥둥 떠나녔다.
내가 한인교회 영어사역부 전도사를 할 때였다. 1.5세대나(한국에서 태어난), 혹은 2세대(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미국인들을 위한 영어 사역이었다. 중학생부터 직장인들의 오래된 불만이 있었다. 왜 어른들은 자꾸만 행사들을 급조해서 마지막 순간에 알려주면서 우리를 동원하느냐란 것이었다. (급조가 아니야 얘들아 원래 그래..) 그래서 나는 최대한 미리미리 계획해서 알려주었다. 담임목사에게도 한달 전에 말해준 거 아니면 못 한다고 못 박아 두었다. (별정직 같은 영어부 사역자니 할 수 있는 요구였다) 예배중 행사안내 시간에 나는 미리 한달전 계획을 최대한 6하원칙에 맞게 알려주고 마지막에는 질문없니?하고 물어봤다. 아이들은 나중에 그런 점에서 존중을 느꼈다고 말했다.
모든 이의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미리미리 계획하고, 모든 정보를 주고 의견을 묻는 것이 일상의 민주화다. 누구도 소외되거나 당황하지 않게, 섬세하고 예민하게 준비하고 신경쓰는 것이다. 그러니 미국사람과 일할 때는 회의시간은 몇시부터 몇시 몇분까지 딱 정해주고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예상안건이나 맥락에 대해 충분히 알려주고 미리 생각해오라고 해야 효율적인 회의가 된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휴일도 무슨 달 몇째 주 월요일 이런식으로 정해놓는다. 한국처럼 매년 징검다리가 연휴가 있네 마네 할 일이 없다. 모든 게 일년 전부터 늘 해오던대로, 계획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이의 평화를 위하여. Cheers,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