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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날 싫어하면 어쩌나

어쩌긴 어째 그럴 수도 있는거지

by 에반스토니언

불안장애(Anxiety Disorder)가 있는 사람들은 일상 자체가 매우 피곤하다. 남들은 안 하는 걱정, 근심, 염려를 모두 이고지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불안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정말로, 불안할 게 없이,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무 일도 없으면 괜히 불안해진다. 이미 했던 일을 다시, 두 번, 세 번, 단도리를 해보며 '혹시 뭐가 나 모르게 진행중인 거 아니지?' 자꾸만 확인하려 든다. 그 모든 나사를 다 조이고 기름칠을 완벽하게 해놓아도 진정한 평화가 임하는 순간은 찰나에 가깝다.


나는 내가 그런 상태일 때, 없던 불안을 끄집어 내어 일부러 만드는 것을 경험했다. 머리와 마음이 텅 비어있으면, 언제 이 평화가 깨지는 불길한 전화벨 소리가 따르릉 울릴까, 걱정을 한다. 행복한 순간에는 행복감에 푹 빠져들어 그 행복을 깊이 누려야 한다. 그런데 그럴 줄 모르는 것이다.


설령 그 행복이 어떤 불길한 일로 끝난다 할지라도, 나는 그 일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 자신을 관찰하다보니 깨달은 것인데, 나는 밖에 나가면 늘 진땀을 그렇게 흘린다. 항상 등과 겨드랑이에 땀이 차오른다. 누군가를 만나면, 최대한 그 사람 마음에 드는 소리만을 하려고 애쓰고, 내 말이 혹시 오해를 사진 않을지, 이 말을 해도되나 어쩌나 머릿속은 복잡하고, 누가 내 행동을 기다리고 있으면 그게 너무 부담스러워서, 얼른 내 자리를 내주느라 바쁘다.


그런 삶 속에는 '나'가 없다. 진정한 '나'를 망실한다. 그래서 밖에 나가 진땀 흘리며 애는 그토록 쓴 거 같은데 돌아오는 길은 뭔가 내가 해야할 말을 못했다는 불만족스럽고 공허한 마음으로 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복기해 보곤 한다.


과외일을 하는 지금도, 이제나 저제나 내가 우려하는 일은,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다. 어떤 학생 부모에게서 전화가 와서, '내가 당신 그거하라고 이 돈 쓴 줄 알아요?!'하는 고함소리를 듣는 일을 가장 두려워 한다. 이것은 내가 대학생으로 과외할 때, 실제로 그런 경우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일종의 PTSD(사후 트라우마)를 겪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올바른 결말은, 어떤 학부모라도 그렇게 본데없이 다짜고짜 화부터 버럭 내는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이며, '진정하시고 말씀 좀 바로 하시죠'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굽신굽신 놀라서 비는 일이 아니라 말이다.


어른스럽게, '저는 최선을 다해 이러저러하게 가르쳤습니다만, 그게 만족스럽지 않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내 할 말 제대로 똑부러지게 하고 끝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얼마든지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다. 상처받는 것은 사실, 내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누군가 나를 싫어하면 어쩌나'하는 불안의 이면을 들춰보면, '모든 사람이 다 내 진심을 알아줘야만 해, 나를 인정하고 내 의견을 존중해주어야만 해, 나를 사랑해주어야만 해'하는, '자고'한 마음이 있다.


왜 그래야만 하지? 당연히 이 세상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 의견이나 감정이 무시당할 때가 더 많지. 왜 모든 사람이 너의 진심을 알아줘야한다고 생각하지? 그건 너무 유치한 마음이 아닐까?


아이를 키우면서도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그런 것이다. '세상엔 네 맘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더 많단다. 모두가 다 너 말을 들어야 하는 게 아니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고 네가 억울할 수도 있는 거야.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너를 상하게 하지 못한단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말이지.'


해사하게 웃는 내 새끼를 보며, '안돼'를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인생에서 가슴아프게 깨달은 것을 전해줘야만 하는 순간들.


'네가 무엇을 해도 우리는 너를 사랑한단다' '네가 잘못을 하면 엄하게 혼이 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너를 좋아하고, 조건없이 사랑한단다' 그것이 다이아몬드 같은 자아를 만들어내는 좋은 이물질이 된다.


그간 내가 만들어온 자아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자아, 삶은 토마토처럼 힘 없이 으스러지고 마는 자아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느낀다. 언제까지나 내가 가짜 사랑과 인정을 받고자, 남의 비위를 맞추며 살기에는 너무나 짧은 인생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살아온대로 사는 게 익숙하고 또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람이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해야하는 일, 자아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 자아를 찾아가야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나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더는 진땀흘리며 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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