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를 맞아 여러 일정을 앞두고 아이들의 구명조끼를 챙기던 남편이 말했다.
"자기, 애들 구명조끼 어디다 버렸어? 구명조끼가 없는데?"
남편의 첫마디에 '욱'이 올라온다.
"구명조끼는 당신이 챙기는 거잖아. 왜 그걸 나한테 물어? 그리고 그걸 내가 왜 버렸다고 생각해? 내가 바보야? 멀쩡한 걸 버리게?"
"당신밖에 버릴 사람이 없잖아. 아니면 어디다 놨나 잘 생각해 봐."
평상시에도 늘 내 건망증을 무기삼아 놀리던 남편에게 사라진 구명조끼의 책임을 추궁당하고 나니 자존심도 상하고 화가 치민다.
"난 버린 적 없으니 당신이 찾든지. 나한테 맨날 깜빡한다고 뭐라고 하지말고, 나머지 짐도 당신이 다 싸!"
결국, 구명조끼는 남편이 꽁꽁 숨겨둔 펜트리 꼭대기에서 나왔다. 나는 내심 통쾌했다. 이제 남은 순서는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는 것뿐. 그런데...그는 출발시간이 다가오기까지 말 한마디가 없다.
나의 분노는 고요한 침묵을 이스트 삼아 점점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시댁을 잠시 들러, 친정과 여행지를 향하는 긴 일정을 앞두고...남편은 침묵 속에 나머지 짐을 싸기 시작한다.
출발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남편이 싼 캐리어를 열어보니 세상에! 내 짐만 빼고 나머지 세 식구의 짐만 그득하다. 정말 내 것만 도려낸 것처럼 하나도 담지 않았다. 내 짐은 내가 챙기라는 저 속좁은 인간의 메시지이겠거니 생각하며 분노를 차곡차곡 챙기듯 내 짐을 겨우 다 쌌다. 그런데 남편이 내게 한 말은,
"당신은 혼자 있고 싶다고 했으니까 며칠 동안 집에 있어."
이게 무슨? 시댁과 친정을 들러 친구들과 가족모임을 하러가는데 나더러 혼자 집에 있으라니. 그의 말인 즉슨, 요즘 내가 혼자 있고 싶다고 했으니 나 혼자 2박3일동안 집에서 푹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란다. 이것은 말인지 방구인지...? 또다시 분노의 2차전이 시작되고, 발효되어 부풀어오르기 시작하던 나의 분노는 악다구니로 빵빵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올해로 결혼 11년자. 결혼식 사진을 박박 찢어버리고 싶은 시기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그와 결혼하였던가. 11년의 시간동안 우리는 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나. 왜 저 인간은 나에게 상처될 말만 골라서 하고 있나. 나는 왜 하필이면 저 인간과 결혼하였나? 왜, 어쩌면, 하필이면...!!!이라는 부사어가 내 생각의 긴 꼬리에 늘 붙어다닌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남편의 친구들과 만난 가족모임에서도 남편은 여전히 말이 없다. 원래도 말이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더 말이 없다. 여기 오기 전에 일어난 대 전쟁을 이야기하며 그에게 맺힌 원한을 사람들 앞에서 쏟아내며 '거봐, 니가 잘못했지?'라고 분위기를 몰아가던 나와는 달리, 그는 아무런 대꾸조차 없다. 그의 친구들은 말했다. 나에게 가지 말라던 표현이...'미안하다'라는 뜻이었을 거라고...그런데 내가 알게 무언가? 나에게는 '넌 가지 마.'라는 메시지만 들렸을 뿐, 어디에서도 '미안하다' 라는 메시지는 보이지 않았다.
11년을 함께 살아도. 그의 표현방식에 나는 적응이 되질 않는다. 입밖으로 내뱉는 말이라고는 "뭘~." "왜~."가 전부인 저 인간과 앞으로 수십년을 함께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혀온다. 11년 전 그의 과묵함은 속깊은 인격체의 상징처럼 느껴졌고, 말하지 않아도 그저 멋있어 보였는데. 11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제발 그와 문장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이 소원인, 아주 소박한 꿈을 가진 마누라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그가 문장으로 뱉어낸 말은 늘 비수처럼 내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고...그는 다시 자신의 말이 불어온 참상을 목격하며 다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아버린다. 늘 그렇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늘 그의 침묵과 나의 악다구니로 끝이 났다.
집에서 떠나온 지 2박3일째가 되던 날. 친구들 속에 서 있는 남편을 본다. 오늘따라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웃고 있어도 우는 것처럼. 축 처진 어깨와 더 줄어든 말수로 그가 더 초라해보인다. 친구들과의 대화에도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주변을 맴돌고만 있는 남편.
그의 외로움이 내 가슴에 저며든다. 2박 3일 내내 내 눈치만 보느라 가뜩이나 고요한 사람이 더 고요해졌다. 이대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판이다. 그런데, 내 남편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건 싫다. 2박 3일만에 처음으로 그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본다. "피곤하지 않아?" "아니." 역시나 단답형 대답이지만, 나는 온몸의 에너지를 동원해서 그에게 '나 이제 화 풀었어.'라는 메시지를 던져본다. 눈치채지는 못했겠지만.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남편에게 "우리집에서 아빠랑 늦게까지 술 마시느라 힘들었지?" "운전하느라 고생 많았네."라며 이야기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여전히 돌아오는 메아리는 길지 않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미세하게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 축 쳐져 있던 어깨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는 것? 땅으로 꺼져가던 그의 생기가 조금씩 돌아오는 모습에 내 가슴의 허전함도 다시 채워지는 것 같다. 하...이래서 나는 당신과 함께 살 수밖에 없나보다. 오늘도 체념하고 만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당신이 외로우면 나도 외롭다. 드라마 남자주인공이 멋있게 하던 그 말을. 나는 오늘도 나즈막히 혼잣말로 던져본다. 그래도 별 것 아닌 것 같았던 11년의 세월동안, 당신의 가슴이 내 가슴이 되고. 당신의 아픔이 내 아픔처럼 느껴질만큼. 그렇게 사랑하며 살았나보다. 밥먹고, 잠자고 애 키우고 싸우면서...별 것 아닌 것 같고 지긋지긋하던 그 시간들이 우리의 가슴을 연결해줄만큼 의미있는 시간이었나보다.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한없는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던 어느날, 서울에서 내려온 남편이 가방에서 무심코 꺼내 준 화장품 세트. 불면증에 시달리며 밤낮으로 힘들어하던 나에게 숙면하라며 사다 준 와인 한 병. 내가 대학원 수업 듣느라 바쁘다고 달달한 커피 한 잔 사다주고 아이들 가방이며 신발까지 다 빨아 챙겨주던 남편의 세심함. 돌이켜보건대, 남편은 나를 위해주고서도 생색내지 않는 과묵함으로 그저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주고 있었구나. 나는 그런 당신이 좋아서 결혼했었구나...기억의 잔상을 돌이켜보니, 남편의 외로움이 내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구나싶다. 다행히 결혼사진 박박 찢어버리지 않았으니, 남은 생은 당신의 과묵함과 미숙한 표현들을 사랑하며 살아가야지.
남편! 당신 뒤엔 내가 있어! 알지? 아무리 생각해도 난 당신밖에 없더라~^^
당신이 사랑한다고 표현 못하면, '사랑해!"내가 대신 말해줄게.
당신이 미안하다고 말 못하면, '나한테 미안해?'라고 물어봐줄게.ㅋㅋ
단답형 대답밖에 못하는 과묵한 당신. 척!하면 빡! 우리만의 쿵짝 리듬을 만들어가며 살자.
I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