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직 17일차 -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어스름한 새벽빛을 뚫고 졸린 눈을 부비며
드디어 교무실에 들어왔다.(아침 출근길은 1시간 10분 정도가 소요된다.)
3월 17일. 새학기가 시작된 지 2주가 조금 지난 시간이다.
감당하기 힘든 업무량과 그것을 해내기 위한 고군분투의 시간들이
지금도 꿈처럼 느껴진다. (몽롱한 정신은 지금도 내 의식을 흐리게 한다.)
나는 교사다.
국어를 잘 가르치고 아이들을 보듬어주고 싶어 이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현실은 가르치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업무라고 말한다.
시덥지 않은 물품구매 하나를 하려면
결재기안을 올려야 하고, 그것을 장바구니에 담아 캡쳐화면을 행정실에 보내야 하고,
교과진도 운영계획표 하나를 짜는 데 성교육, 학교폭력, 안전교육 일정까지 넣어야 하고
아이들에게 매일 온갖 가정통신문을 나눠주고 회수하고, 설문조사 통계를 내야하고
사진 명렬표를 완성하기 위해 일주일 넘게 아이들에게 파일을 보내라고 닦달하고
사진 파일을 받아 파일명을 하나하나 수정해가면서 크기변환이 안 되는 한 장의 사진을 가지고
또 싸매고 끙끙대다....
날아오는 수십개의 쪽지로 떨어지는 업무 소나기를 피할 틈도 없이 해내야만 한다.
그러다 좀 전에 하던 하나를 잊고....그러다 수업을 가고...다녀오면 공문접수....
기일이 정해진 업무에 공문처리를 위해서는 왜이리도 조사할 것이 많은지....
부장이 되고나니 학교안의 온갖 위원회에는 모두 소속되어서
점심시간도 아껴가며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화장실 가는 일을 참는 것은 이미 예사가 된 지 오래다.
점심시간 급식지도로 아이들을 줄세우며 웃으며 인사하지만,
속으로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급식지도 끝나고 나면 아이들이 북적거리는 탈의실에 들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심한 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지도해야 한다.
아이들을 내쫓고 벌점을 주겠다고 공지하고...복도를 순시하며....
마주치는 아이들과는 또 웃으면서 인사한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오후 수업 때면 아이들도 나도 이렇게 피곤하고 지칠 수가 없다.
그래도 교사로서 남은 마지막 양심 때문에
아이들 활동지를 걷어 일일히 검사하고 채점하고 다시 나눠주고...
또 새로운 학습지를 만든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일은 다시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나는 또 집에서 가져온 커다란 카트에
업무용 컴퓨터와 온갖 서류더미와 수업준비를 위한 책을 차 트렁크에 싣고,
러시아워로 2시간 가까이 걸리는 퇴근길을 재촉한다.
어스름한 새벽 출근, 어스름한 저녁 퇴근.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매일 새로운 꿈을 꾼다. 나만의 시간을 통해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했다.
하지만 한 시간 일찍 출근할수록 오늘 해야 할 일의 목록들이 나만의 시간을 아무렇게나 휘저어 놓고,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10분, 20분 속에 점점 더 '오늘'의 모래더미 속으로 파묻혀간다.
공교육 선생님들에게 이렇게 많은 짐을 지워주고 사교육비가 너무 많다고 걱정을 하는 나라.
정말 이상한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