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나를 떠나보내며

- 마흔이 되어서야 배운 자전거가 내게 알려준 삶의 진실-

by 비밀의 화원

얼마 전 아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중, 엄마 아빠와 함께 하고 싶은 일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우리 동네를 벗어나 시내까지 라이딩을 하는 일이라고 했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나는 아빠와 함께 하면 되겠다고 남편에게 은근슬쩍 미루었지만, 남편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고 아이는 요즘 자신만의 외로움에 빠진 듯 무척이나 허전해보였다.

'그래, 불가능한 일이라면 몰라도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해 주자.' 충동성이 강한 나는 또 마음을 먹으면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지라...그날부터 당근마켓 중고거래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남편도 언젠가는 해야할 일이라는 것을 직감해서일까.ㅎ 이젠 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아파트 안에서는 방치된 자전거를 정리하는 기간이 진행중이었다. 정해진 기한까지 일정한 장소에 모아놓은 자전거를 찾아가지 않으면 폐기처분 한다는 공고문이 아파트 게시판에 게시되었는데, 남편은 이때다 싶었나보다.(공고한 마지막 날은 이미 지난 뒤였다.)

어느날 저녁을 먹고 밖을 나서더니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몇 시간만에 돌아온 남편은 녹이 다 슬었지만, 꽤나 쓸만한 자전거 한 대를 끌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며칠 뒤 다시 그 자전거를 끌고 나가더니...녹을 다 닦아내고 버려진 자전거를 새 것처럼 변신시켜 돌아온 것이 아닌가!!(역시, 짠돌이 내 남편! 장하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자전거를 배우는 일이었다. 자전거 고수인 열 살짜리 아들은 "엄마, 내가 가르쳐줄게. 나만 믿어." 자신에게 배우란다. 처음엔 썩 믿음직스럽지 않았지만, 묘기까지 부리며 자전거를 타는 아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는 "재인아, 엄마는 자전거 타면 자꾸 한 쪽으로 쏠리는 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해?"라고 물었다. 아들은 "엄마, 그럴 때는 반대쪽 핸들에 힘을 줘 봐.내가 시범을 보여줄게."하며 친절하게 시연도 해 준다. 페달에 발만 얹으면 쓰러지던 나는 아들의 코칭을 받자마자 두 바퀴, 다섯 바퀴...그리고 마침내 제대로 탈 수 있게 되었다!! (아들, 고마워!!^^)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데 아들은 묻는다. "엄마는 마흔 살까지 자전거도 안 배우고 뭐했어?" 나는 아들의 질문에 생각에 잠겼다. 내 어린 시절, 내게는 자전거를 사 준 부모님도 자전거를 가르쳐 준 부모님도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내 머릿 속에는 어린 시절 늘 기죽어있고 불안에 떨며 오늘 하루만 무사히 넘어가기를 바랐던 그때가 떠올랐다. 별 것도 아닌 질문에 눈물이 찔끔 난다. "엄마는 옛날에 자전거도 없었고, 할아버지가 자전거도 안 가르쳐주셨었네."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가슴이 먹먹하게 내려앉는다.




다음 날 저녁, 네 식구는 식사 후에 모두 나와 자전거를 탔는데, 남편은 나의 자전거 실력이 몰라보게 향상된 모습에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보란듯이 자전거를 타고 홀로 아파트 단지 안을 달리는데...크나큰 단지 안을 세 바퀴, 네 바퀴를 돌며 내 안에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상처 많았던 내 어린시절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느낌. 내 어린시절에는 나에게 자전거를 사 주거나 가르쳐 준 부모의 살뜰한 보살핌이 없었지만, 나이 마흔에는 더이상 내 어린시절이 서럽거나 원망스럽지 않다. 녹이 슨 자전거를 (한여름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짝반짝 닦아 새 것으로 만들어 준 남편과 나에게 친절하게 자전거를 가르쳐 준 아들(만약 친정 아빠에게 배웠다면 백 번 이상 고함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드디어 내 두 발로 자전거 페달을 굴리며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함께 달리는 내 가족들이 있다.


그날 남편은 자전거 뒷 안장에 아이들을 하나씩 태우고 단지 안을 돌고 왔다. 아들 한 바퀴, 딸 한 바퀴. 그 사이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단지 안을 울리는 모습에 나는 흐뭇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집으로 들어가자는 나에게 아직 자전거에서 내릴 생각이 없어보이는 남편이 말했다. "빨리 타! 이젠 자기 차례야!" 나는 남편의 두툼한 뱃살을 끌어 안고(그 뱃살이 어찌나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럽던지...) 남편이 운전하는 자전거의 뒷안장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행복을 만끽했다. (천성이 크게 웃지를 못하는 사람인지라...비실비실 큭큭이 전부인 웃음이었지만.)


이제 마흔에 접어든 나는 얼마 전부터 항우울제를 복용중이다. 아이들을 양육하며 불쑥불쑥 올라오는 기억들과 나도 모르게 내재된 우울의 안개가 나와 내 가족의 삶을 자꾸만 불행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아무리 최선을 다해 살아도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힘들게 하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나는 내 생각과 마음에 정면도전하기로 했다. 지금은 약물을 통해 내 삶의 불안들을 떨쳐내고 있지만, 머지않아 나는 내 가족들을 통해 어린시절의 '묵은 쌀 가마니'(지나영 교수님의 표현)를 모두 털어내고 내 남은 삶의 중반부를 멋있게 자전거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자유롭게 달려가리라!!


마흔에 다다른 내가

보살핌을 받지 못해 서러웠던 내 어린시절을 위로하며.

이제서야 남은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꼭 안아 포옹해준다.


삶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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