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이유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21화: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by 최해주

이곳에 온 뒤로, 연화가 매일같이 상상하던 평화로운 일상 그대로였다. 해가 뜨면 밭으로 나가고, 물을 긷고, 아이들은 집 주변을 돌며 작은 일을 도왔다. 진실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고, 몸은 이미 이곳의 리듬에 익숙해져 있었다. 윤은 밭에서 돌아와 씨앗을 다시 고르고 있었다. 사시사철 흙은 언제나 촉촉했고, 씨를 뿌린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싹이 올라왔다. 계절은 바뀌었지만 급하지 않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땅은 늘 먹을 만큼을 내주었다.


“서방님.”

연화가 불렀다.


“오늘은 이만하면 될 것 같아요.”

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괭이를 내려놓았다.


“돌섬의 땅은 정말 신통방통해요.”


“왜 그러시오 부인?”


“우리가 씨를 뿌리는 곳마다 정성을 보이면

금세 자라나지 않소?”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우던 채소들과 가축들은 이들의 정성에 보답이라도 한 듯 늘 곁에 머물렀다가며 새로운 손님들을 보내 주었다. 아이들은 항상 함께 나와 연화와 윤을 도우며 삶의 지혜와 살아가는 법을 배워 나갔다.


“어머니, 여긴 밟으면 안 돼요.”


“우리 수아가 이곳에 씨앗을 심어 두었던 자리구나.”


“네. 어머니 얼마나 예쁜 싹이 나올까 너무 궁금해요.”


연화는 그런 수아를 바라보았다. 수아는 더 이상 연화 품속에 있는 갓난쟁이가 아니었고 예쁜 꽃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이곳 돌섬에 와서부터는 아이들은 크게 탈이나지도 다치지도 않았다.


“아버지.”

원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여긴 사람들이 잘 안 오죠?”


“그래.”


“그럼 우리가 계속 여기 있어도 되는 거죠.”


“그렇다. 안심해도 된단다.”

아들의 말에 윤이는 단 망설임이 없었다.


연화는 그제야 지금 상황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윤은 오래전부터 떠날 준비를 하지 않았고, 돌아갈 곳도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연화는 아이들을 재운 뒤 윤이를 찾아 나섰다. 윤이 마당 앞에 먼 곳을 바라보며 평온히 앉아 있었다.


행복이 머문 자리

“서방님 왜 안 주무시고 나와계셔요.”


“바람이 너무 좋아서.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잠이 오질 않구려.”


“연화야.. 참으로 고맙구나.”


“서방님도 참.. 뭐가 그리 고마워요?”


“긴 세월이 지나도 날 잊지 않고 찾아줘서.”


“아니 무슨 말씀이어요.

제가 서방님을 어떻게 잊는답니까.”


“난 우리가 산 육신이든 죽은 육신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산 육신 따윈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서방님 그게 무슨 말씀이어요”


“연화야 혹시 그날을 기억하느냐.”


“만삭인 너와 우리 원이를 우물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던 날을”


“그리고 내가 꼭 돌아오겠다는 그 약조 기억하느냐”


“서방님도 참..

그걸 어찌 잊겠습니까.”


“그래. 근데 그 약조 나는 못 지킨 것 같구나.”


“내가 네게 꼭 다시 오겠다는 약조 못 지켜서 참으로 미안하구나”


“하지만 네가 나를 찾았느리라.”


“서방님 그게 무슨 소리여요?”


“너는 지금 이 세계를 믿느냐.”


“돌섬에서의 생활이요??”


“그래.. 근데 연화야 너무 깊이 알려하지도

알아도 너무 슬퍼하지도 말거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혹여 네가 지금의 상황을 알게 되더라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우린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면 되느리라.”


“내가 네 옆에 있고, 우리 아이들이 우리 곁에 있는데

우리 그것에만 감사하며 살아가자.”



“나는 우리가 함께하는 이 세계가 저승이든 이승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우리 가족이 함께 한다는 것 그게 중요한 게 아니더냐”


연화는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연화는 무의식처럼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미 아이를 낳은 몸이었다. 그날 우물 아래에서, 숨이 끊어지던 바로 그 자리에서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울음도, 기다림도 허락되지 않은 출산이었다. 어쩌면 그날의 출산은 삶을 이어 가겠다는 계산이나 희망 때문이 아니라, 그 역경 속에서도 아이만은 지켜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지도 모른 채, 연화는 아이를 세상 밖으로 밀어냈다. 윤이 말한 ‘산 육신’과 ‘죽은 육신’ 사이에는, 연화가 모성으로 지켜 온 것들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태어난 아이도, 태어나지 못한 아이도, 잃었다고 여겼던 시간도 그 경계 어딘가에 함께 놓여 있었다. 연화는 이제 더 이상 그것들을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윤의 말대로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한다는 것 그것이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현실로 태어나지만, 동시에 엄마의 상상 속에서 자란다. 아이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현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엄마는 이야기를 만들고 세상을 조금 부드럽게 바꾼다. 그 상상은 아이를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가 세상을 견디게 하는 또 하나의 현실이다. 연화의 이야기를 쓰며 나는 알게 되었다. 모성의 힘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를 지키겠다는 마음, 끝내 놓지 않겠다는 마음은 시간보다 먼저 도착해 오래 남는다. 어쩌면 연화는 자신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도 모른 채, 돌섬이라는 작은 세계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곳은 그녀가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그려 왔던 자리였을 것이다. 가족이 함께 자고, 함께 밥을 먹으며 하루를 보내는 소소한 삶.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고, 애써 벗어나려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들. 연화는 그것을 행복이라 불렀고, 꿈이라 여겼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가장 조용한 상상 속에 자신의 방을 만들어 그 안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사라지지 않았고, 누구도 홀로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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