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패배의 시절이 다가왔으니, 새로운 부부로 삽시다!
우리 부부는 산책을 참 좋아하고 많이 한다. 친한 친구와는 대화를 할수록 할 말이 더 많은 것처럼 나와 남편은 틈만 나면 산책을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그랬다. 어른들에게나 산책이 휴식이지 아이들에게는 걷기가 지루한 지 백 미터만 걸어도 보채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부모는 꾀를 내어 시합을 청한다.
"저기 나무 있는 데까지 누가 제일 빨리 가나 시합을 해보자. 아빠는 제일 빠르니까 여기서 시작하고, 나빈(첫째)이는 다섯 걸음 앞에서, 시안(둘째)이는 누나랑 같이 서고, 시온(막내)이는 제일 어리니까 열 걸음 더 앞에서 시작하는 거야."
물론 나는 뛰지 않는다. 대신
"자, 그럼 엄마가 하나 둘 셋 시작! 을 할게~ 하나~ 둘~ 셋~ 시~ 작~!"
그리고 뒤에서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것이 내 몫이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남편이 1등을 도맡았다. 2등은 둘째 시안이였다. 별 것 아닌 우리 집의 달리기 시합을 관람하는 재미는 나의 남편이 그래도 아직 제법 뛸 수 있다는 사실, 그 건재함을 확인하는 시간이자 장남인 시안이가 파워풀한 에너지로 아빠를 따라잡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흐뭇함을 동시에 확인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몇 주 전 주일예배를 마치고 시안이와 아빠의 달리기 시합이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남편이 아들에게 제대로 첫 패배를 했다. 그리고 아주 깨끗하게 앞으로 달리기로는 아빠가 아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남편은 순순히 인정하고 말았다. 아마도 영원히!
남편은 아들의 어깨를 쓰윽~ 치며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아들 시안이도 어깨가 으쓱한 것이 키도 크고 강하기만 했던 아빠를 제대로 이긴 것에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그. 러. 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마음이 들었다. 곧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너무 빨리 온 것 같아서 애석하다고 해야 할까? 남편이 아들과 고작 달리기 시합에서 졌을 뿐인데 일 순간 내 몸에서 힘이 확 빠지는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검도와 배드민턴으로 다져진 상체, 자전거 타기로 단련된 하체까지 남편의 근력은 나에게는 든든함을 주었고, 강하고 단단해 보이는 느낌은 의지할 만한 쉼터의 편안함을 주었다. 그런데 중1의 여리한 아들과 달리기 시합에서 지다니! 그동안 남편에게서 느껴왔던 안정감의 기둥 중 하나가 쑥 빠져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에게 의지하며 사는 게 좋았는데 이제 안정적인 의지처가 힘을 잃어가는 건 아닐지 괜스레 짠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거친 숨을 쉬는 남편에게
"진짜로 시안이에게 졌다고요?"
"시안이가 이제 정말 빨라요. 못 이겨요."
"우와~ 남편 너무한데요?"
"뭐가 너무해요. 시안이가 잘 달리는 거 보니까 좋기만 하고만."
남편은 아들을 보고, 나는 남편을 보고. 남편은 아내인 내 마음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강인한 남편의 이미지가 퇴색해질 때 아내가 어떤 마음인지 도무지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섭섭한 마음도 이내 접어놓고 동반자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지금부터가 시작인가 싶은 새 마음이 들었다. 살면서 조금만 불편하고 힘들면 "여보!!!"를 외치면 남편은 후다닥 뛰어나 "네?"라고 반응해 주었다. 만능 해결사 같았던 남편인데 이제는 "여보!!!"를 좀 덜 외쳐야 지겠다는 생각도 든다. 남편의 패배를 본 후, 내 마음에서도 남편에 대한 안쓰러움이 더 커졌다. 내 반쪽이니 내가 아껴줘야지 싶다. 그래야 더 오래 함께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