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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Feb 24. 2024

남편의 밤잠을 설치게 만든 그 여자

나의 남편 인로씨와 결혼해서 사는 것에서 가장 만족하는 한 가지가 있다. 내가 힘들어하는 일을 남편에게 부탁하면 남편은 어떤 경우든 아내의 요청에 거절 없이 자신이 소화를 해준다는 거다.


신혼 초에는 음식물쓰레기 버리기, 화장실 청소, 육류나 생선류 손질하기 등 지금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 소소한 일들이다. 장을 봐와서 손질하고 요리는 하겠는데 남은 쓰레기를 정리하는 건 왜 그렇게 싫었던지, 신혼집 빌라는 물론이고 결혼 후 수년을 화장실 청소는 늘 남편 담당이었다. 육류와 생선을 손질하게 된 것도 첫째 이유식을 만들면서 모성애가 발동하고서야 가능해졌다. 나도 참 별난 아내였다.


용산 후암동의 빌라에서 처음 아파트로 이사할 때, 그때도 내 인생 최초의 불편한 일을 맞닥뜨렸다. 일꾼으로 온 두 아저씨의 거친 말투와 행동에 매우 불쾌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젊지만 덩치로는 지펠 냉장고라는 별칭을 갖고 있던 남편이 나타나자 아저씨들의 거친 언사들이 눈에 띄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살다 보면 겪어내야 하는 다양한 일들 중에 남편의 영역과 나의 영역은 섬세하게 세분화되기 시작했다.


2008년 4월에 결혼을 했으니 우리가 부부가 된 지 벌써 16년 째다. 그 기간 중 우리들이 이사를 한 건 크고 작게 12번은 된다. 진득하니 한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 이사들 중에서 전세도 있었고, 자가였던 적도 있어서 집과 관련된 다양한 계약관계를 처리하는 건 주로 남편이 맡고 있다.


결혼 10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서울입성이 성취되었다. 강남 3구로 꼽히는 송파구에서 가장 싼 아파트를 자랑스럽게도 내가 찾아냈다. 오금동 성내천 가까이에 있던 25년이 넘은 아파트였다. 집은 사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왕이면 장기적인 자산가치를 높이는 곳이면 더 좋은 것이다. 때마침, 남편 직장이 평촌에서 강동구로 옮기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아이 셋을 키우는 상황이었던 터라 남편직장이 가까운 곳을 열심히 찾았다. 이런 건 남편보다 내가 잘한다.


오래된 낡은 집이라 수리까지 해서 이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아파트 전체가 리모델링을 한다고 2년 정도 겨우 살고 또 이사를 하게 되었다. 투자자의 관점에서는 너무도 잘 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거주자였고, 마침 부동산 경기가 활황이라 많지 않은 이주비 대출을 받고 번듯한 집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다시, 우리 부부가 육아하기에 가장 좋았다고 생각했던 평촌의 24평형의 복도식의 작은 아파트의 1층을 전세로 구해서 이사를 했다.


'좀 좁으면 어때? 몇 년만 참자!'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당시가 코로나 시즌이라 아이 셋과 좁은 집에서 살다 보니 숨이 막혀 주말마다 밖으로 다니지 않으면 너무 피곤한 일상이 펼쳐졌다. 집은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축적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내가 대뜸...

"여보... 좁아서 아이들 소리가 귀에서 매일 쩌렁쩌렁 울려서 어지럽고 울렁거려요. 우리 넓은 집으로 차리리 월세를 갑시다." 제안을 했다.

남편 역시 나의 생각에 적극 동의했고 우리가 생각하는 가격대를 설정하고, 이번에는 두 배나 큰 50평형으로 월세를 구했다.


계약서를 쓰는 날, 집주인과 처음으로 대면하였다. 주인의 주소지는 타워팰리스, 오래전에 평촌에 살았는데 이 동네에 아파트를 두 채 갖고 있으면서 월세를 받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계약하려던 집은 자기가 이사 들어가기 전에 살던 사람들이 자녀들을 서울대, 연세대 보낸 좋은 기운이 흐르는 집이라며 자기 집을 자랑했다(경기도의 학군지라고 불리는 평촌에서는 서울대 보낸 집은 거래가 잘된다는 얘기가 실제로 있다. 믿거나 말거나).


들고 있는 가방은 샤넬, 가방에서 꺼내는 소품들과 몸에 걸친 것들도 죄다 명품이었다. 그러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명품을 걸친 여주인은 말수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리 유쾌한 인상도 아니었다.


막상 집에 세입자로 살다 보면 주인과 만날 일은 잘 없다. 계약서 쓸 때와 돈을 받고 나오는 때를 제외하고는 부딪힐 일이 없다. 그런데 평촌이라는 동네의 아파트들이 죄다 낡아서 집을 수리해서 써야 하는데, 우리가 이사하기 전에도 계약서에 도배, 조명 등 갖가지 수리 사항이 기재되었다. 물론 그 일들을 돈 많은 집주인이 일일이 챙길 리 만무했고 부동산 사장님이 오셔서 모니터링을 하며 봐주셨다. 여러 가지를 소소하게 고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이 오갔는데, 주방 싱크대를 수리하시는 분은 "더 좋은 걸 같은 비용으로 해준 건데도 굳이 자기가 원하는 게 안되어 있다며 컴플레인을 해서 다시 하러 왔다"며 세입자인 나에게 투덜거렸고, 부동산 중개소 사장님도 "주인이 돈을 제대로 지불을 안 해서 골치가 아팠다"며 정황은 정확히 알 수 없는 말들을 투덜거리며 방문하기도 했다. 나는 내심 집주인이 조금 별난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며 지나갔다.


50평 집은 다섯 식구가 살기에 넓고 쾌적한 공간이었다. 연년생 초등생과 유치원생 막내까지 가세해서 놀다 보면 웃다가 울다가 소란스럽기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런데 공간이 넓으니 그 소리들이 귀에 날카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넓은 집에서 산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지금 재직 중인 대학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고 아이들과 나는 지방에서 생활하고 남편은 50평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하기 시작했다. 가족 내에서 이직이라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했으니, 우리 부부는 집주인도 이해해 줄 것이라 여기며 같은 가격으로 월세를 내놓고, 부동산 거래에 따르는 제반 경비들을 모두 책임지겠다고 우리들의 의사를 전했다.


그때가 2022년 말이었으니  대출이율은 높아지고 있어서 거래가 얼어붙어 있었다. 자연스레 가격도 낮게 조정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들의 예상과는 달리 집주인은 월세를 오히려 높이겠다고 했다. 그 말의 의미는 계약 기간을 지키라는 뜻이었고, 집을 내놓았지만 보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남편은 집주인과 몇 번 소통을 해보더니 상식적인 차원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대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냈다.


하는 수 없이 계약 기간을 지켰고 그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런데 남편의 표정이 유독 예민해 보였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아내가 넓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말에 선뜻 이사 와서 절반은 편안했고, 절반은 혼자 지내느라 이 집에서의 기억은 그리 좋을 리 없었다. 그런 집에서 벗어나는 게 나는 속 시원하다 싶기도 했고, 드디어 오금동의 새로 지어진 우리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설레기도 했다.


잠자리에 누워, 내가 말했다.

"남편, 우리가 드디어 41개월의 유랑생활을 끝내고 우리 집으로 가네요.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진짜 우리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주인이 뭔 꼬투리를 잡지 않아야 할 텐데, 예측이 안 되는 사람이라 걱정이네요."

"잘 될 거예요."

그럴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내일이면 우리 인생의 고단했던 이주생활이 마무리된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남편보다 훨씬 신나 있었다.


드디어 이삿날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새집 청소와 입주 당일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해 남편으로부터 상세하게 안내받고 새집에 도착했다. 입주 당일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에 남편과 내가 다시 상봉을 한 건 예상보다 지체되어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지난 5시간 동안 극도의 스트레스를 경험한 남편이 역시나 예측불가했던 집주인과 있었던 아슬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잔금 정산을 하려는 마지막 순간에 집주인이 갑자기 자신은 세입자에게 아파트 분양받았을 당시에 받았던 서류와 열쇠 꾸러미를 모두 전달했다며 그게 빠져있다고 잔금 정산을 못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지어진 지 30년이 되어가는 아파트이고 내가 계약하면서 들었던 집주인의 히스토리에 따르면 집을 분양받아서 매입한 것도 아니었는데 듣도 보도 못한 서류를 내놓으라고 고집에 생떼를 부리더라는 거다. 그 집주인이 자기 말이 옳다며 우기는 30여분 동안 부동산 중개인도 당황하며 이렇게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서 거래하면서 그런 서류를 세입자에게 주는 경우는 없다고 설명에 설득을 거듭했지만 소용이 없었단다. 그래서 남편은 계약 당시 서류를 처리해 줬던 부동산에 다시 연락을 해서 그런 특약의 내용은 기재된 바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제야 여주인 꼬리를 내리며 순순히 잔금을 처리해 주었다는 것이다. 상상도 못 했던 서류를 찾아오라니 급한 마음에 무릎이라도 꿇고 통사정이라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스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남편은 일처리를 하면서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 아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세입자가 불평을 하면 그 불평에 대해 손익 계산을 하기보다는 집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수리해 주고, 집수리에 필요한 물품을 골라도 이왕이면 좋은 것을 골라서 후하게 처리해 준다. 자신에게는 일 푼을 아끼는 사람이 남에게는 후히 베푸는 사람이다. 오래전에 전세 세입자가 가계약금을 걸어두고 이틀 만에 계약을 파기한 일이 있다. 그때도 남편은 우리처럼 젊은 부부가 그 돈 때문에 부부싸움을 할 게 뻔하니, 가계약금을 모두 돌려주자고 했다. 명문화된 계약서와 상관없이 남편은 자신이 좀 손해 보더라도 선한 것을 선택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남편의 후히 베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집주인을 만난 것이다. 강남 요지에 살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하고, 고급 외제 세단을 타고 요염하게 나타난 그 여인이 어젯밤 남편의 밤잠을 설치게 하더니만 단 30분 만에 남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았던 50평 넓은 아파트를 생각하면 그 넓은 공간이 우리 가족에게 허락되었던 것이 솔직히 감사하다. 그리고 아내의 요청에 남편이 동의하고 함께 해준 그 마음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런 집주인을 만난 건 괴로움이긴 했다. 하지만 괴로웠기에 성찰할 거리들을 얻게 됐다. 아무래도 50평은 우리에게는 과욕이었다는 반성과 잘못에는 응당 대가를 치른다는 교훈을 얻었다.


또 하나, 중요한 교훈! 돈을 많이 갖는 것보다 자신에게서 나온 돈의 향기가 아름답게 뿜어내도록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 많은 돈을 소유했을지 모르지만 인격이 바르지 않았을 때의 모습은 가진 것들이 모두 명품이라 할지라도 추해질 수 있다는 것.


50평 아파트에 대한 우리 부부의 기억은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함부로 돈 티 내지 말자고, 늘 겸손하자고, 그녀는 우리가 만난 손에 꼽히는 반면교사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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