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기 4 : 산다는 건 여러 길을 걷는다는 것

by 자유인

수년 전에 잘 알고 지내던 공무원 한 분이 정년에 가까워 퇴직을 하시며 첫 계획으로 제주 올레를 걷기 위해 한달살이를 한다고 하셨다. 일로 바쁜 일정을 보내던 40대 초의 나는 인생의 한 챕터가 끝난 시점에 하필이면 걷기 위해 제주를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때는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다.


제주 올레를 처음 걸었던 것은 친한 언니가 여름방학이 되었으니 하루쯤은 청소년기 아이들을 방치하고 온전히 우리 자신만을 위한 쉼을 갖자며 올레 20코스로 향하자고 했다. 하루여행으로 제주를 갈 수 있다는 것에 호기심이 발동해서 가겠다고 했다. 길을 걸으며 언니는 최근에 있었던 건강검진과 수술 등 일련의 경험들을 이야기하며 그 요동치는 마음을 이겨내는 데 제주 올레 걷기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길동무를 옆에 두고 걷더라도 나의 걸음은 오직 내 몫이었고, 그 사이 흐르는 침묵은 오직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때로는 자연과, 때로는 길동무와, 때로는 깊은 나의 내면과 벗이 될 수 있었다. 더 군다가 하늘과 구름만 봐도 시가 읊어지곤 하는 나의 감성으로는 제주에서 만나는 다채로운 길들은 나의 온 세포를 깨워 생명과 살아있음, 감사와 감격을 온 마음으로 누릴 수 있었다.


아이 셋과 걷는 길도 그랬다. 바다 곁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의 시선이 땅으로 향할 때 그곳에는 옅은 보랏빛의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예쁘게 손짓하는 것 같았고, 저 멀리 흐린 하늘과 맞닿은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흐릿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는 지난 만남들을 생각했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어느새 생각보다 훌쩍 자란 아이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그 시간을 보내어 오십을 향해 가고 있는 내가 낯설기도 했다. 저 멀리 보이는 항구가 한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뒷전으로 물러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실감하며 한걸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우리네 인생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는 것인지도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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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펼쳐진 바다를 품에 안고 걷던 중에 지나는 길이 너무 이뻐서 아이들에게 불쑥 한마디를 건넸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길이 있어. 그리고 세상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길들이 있어. 그런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큰 기쁨이고 행운인 것 같아. 엄마는 이 예쁜 길을 걷는 게 참 좋아."

이번에도 역시나 화답의 주인공은 막내다.

"엄마! 저기 가서 사진 하나 찍을까요?"

그럼, 팔을 활짝 벌려보라는 엄마의 요청에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귀여운 뒷모습의 주인공이 되어주었다.


걷는 내내 나는 여행자가 되어 길을 걸으며 누릴 수 있는 이 엄청난 감흥들과 교훈들을 하나라도 더 아이들과 나누고 싶어 온 마음의 더듬이를 세우고 있었다. 오늘의 길동무가 자녀들이 아니었다면 내 온몸의 세포들을 죄다 깨워 흔들어 홀로 사유의 즐거움을 누렸을 테고 그것만으로 그저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곁에는 세 아이들이 있기에 반가운 사색과 감흥의 일부를 뚝 떼어 아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알던 모르던.


마흔이 되기 전에는 불확실했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의 삼십 대는 목표를 향해 그저 매진하는 시기였고 그것만으로도 내 삶의 동력으로는 충분했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서면서 목표는 이루어졌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삶의 방향이 상실된 듯한 허탈함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새 길에 대한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수년을 보내고 있지만 마음에 쏙 드는 열정을 재가동시킬만한 그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어떤 날은 이만하면 괜찮다는 자족과 감사로 나의 하루를 보내지만, 또 어떤 날은 더 이상 가슴 뛰는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목표가 없음에 마치 길을 잃고 헤매는 막막함에 불안이 찾아올 때도 있다. 그 모든 나의 하루하루가 결국 지나 보니 '그 어떤 길'이 아니었나 싶어 엎치락 뒤치락하던 마음을 바르게 재배열해 보았다.


아이들과 나란히 걸으며 또 한마디를 건넸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무엇이든 꿈꾸고 도전해 볼 수 있는 너네들이 부러워. 너네들은 뭐든 할 수 있어."

어쩌냐?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엄마도, 이모도, 심지어 할머니도 내게 하셨던 말이다. 그때의 나도 무슨 심경으로 내게 저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눈만 말똥말똥 굴렸던 기억이 난다. 가까이에서 걷던 첫째 딸의 큰 눈이 유난히 커진 것은 아마도 그때의 나와 같은 생각이지 않았을까 싶다. 길 위에 서서 길을 묻는 나그네의 심정을 알리 없는 아이들이지만 삶 속에 펼쳐진 수많은 길들을 아름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묵묵히 걸어주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얘들아. 세상에는 정말 아주 많은 길들이 있단다. 평탄한 길, 울퉁불퉁한 길, 향기로운 길, 악취가 나는 길, 예쁜 꽃길, 질퍽한 진흙탕길, 오르막길, 내리막길. 그런데 걸을만하면 걷고 꽃길이 나오면 잠시 쉬어도 돼. 악취 나는 길을 만나면 요령껏 재빨리 벗어나야겠지? 질퍽한 길에도 지혜를 발휘하렴. 오르막은 숨을 고르고 발끝을 보고 멀리 생각하기보다는 걸음에 집중해. 내리막은 더 조심히, 천천히 걸으렴. 그 어떤 길도 마다하지 말고 묵묵히 걸어보렴.'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걸었던 여러 길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그저 오늘 걸으며 만났던 길들에 대한 기억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지혜로 아이들에게 심겨 지기를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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