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엄마가 스스로에게 해주어야 할 말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한다. 이 말이 일견 옳기도 하다. 어려서는 나도 엄마를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사랑의 방향이 부모보다는 자녀에게로 향하는 걸 느낀다.
나의 사랑 그릇이 더 컸다면 사랑의 방향이 위아래로 고루 흘렀을까 싶기도 하지만 나란 사람은 그러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나는 13살, 12살, 7살 세 아이를 키우는 직장맘이다. 요즘 들어 세 아이들이 폴짝 뛰어다니는 뒷모습을 보면, 내가 준 사랑보다 나의 부족함이 떠오를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인 나를 신뢰하고 품에 안겨 오는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아이들의 소중함이야 형용할 수 없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따뜻한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는 엄마는 아닌 것 같다. 일하는 엄마, 바쁜 엄마의 삶을 살아서라는 것이 타자의 시선에서 얼마나 이해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편에서는 중요하다.
일주일을 쪼개고, 하루 중 24시간을 최대 효율로 써야 내게 주어진 역할들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 적당히 바쁠 때는 날짜를 잊고 살지만 더 바쁠 때는 요일조차 잊고 산다. 그저 오늘 하루를 눈썹 휘날리며 살아낸 것이 다행스러운 날도 있다. 왁자지껄한 저녁 시간이 지나고, 세 아이들이 곤히 잠든 늦은 밤에서야 오늘 몫의 평온을 느끼곤 한다.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작고 섬세한 것들을 지나치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마철이 되면 3단 우산을 신발주머니에 넣고 늘 갖고 다녀야 한다고 일러준 적은 있지만, 교문 앞에 서서 우산을 갖고 나온 엄마를 반가워하는 아이의 깜찍하게 귀여운 모습을 본 적은 없다.
학부모 참관 수업은 왜 하필이면 변경 불가능한 일정들과 겹쳐지는지. 교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지내는지도 기억에 담아본 적이 없다. 그저 잘하고 있으려니 믿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하나를 낳아 키웠다면 늘 아이를 중심으로 전전긍긍하며 살았을 것 같은데, '셋이나' 되니 마음이 다가가는 만큼 내 손이 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모든 공백을 나는 아이들에게 여유가 되리라 믿으며, 신뢰의 빛을 쬐어줄 뿐이다. 이 빛이 아이들이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시간에 아이들을 감싸 안아주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기도의 응답일까?
다행히 아이들은 엄마의 부족한 손길을 대신할 나름의 생존기술들을 익혀 나간다.
요즘은 엄마 아빠가 없어도 먹고, 입고,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 정도는 거뜬히 살아내겠구나 싶어 기특하다.
이만하면 됐다.
그래! 아주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