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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Sep 26. 2022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고?

자식 키우기란...

얼마 전 지인들과 모여 앉아서 자녀 양육에 관한 담소를 나누었다. 20대의 장성한 청년을 둔 분들도 계셨고, 나와 같이 유아기의 아동을 둔 분도 계셨다. 자녀를 성인자녀를 둔 한 분이 자녀 양육을 한 마디로 설명하셨다. 그것은 바로 '지랄 총량의 법칙'이다. 아이들마다 부모 품에서 크는 동안 제각각의 지랄 맞은 시기를 보내는데, 순하던 아이가 느지막이 지랄을 부리기도 하고, 어려서 속 썩이던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 순하게 변하기도 한다며, 어쨌든 자식들은 해야 할 지랄의 총량을 다한다는 것이다. 기껏 위로라는 것이 그래도 어릴 때 부모의 안전한 품에서 지랄을 떠는 게 그래도 낫다는 정도였다.


부모의 입장에서 지랄 맞은 행동은 사소한 것들이다. 부모의 시시콜콜한 지시에 어느 날 눈을 부릅뜨고 반항기를 보인다거나, 문을 쾅 닫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 건성으로 대충 대답하고 나서 정작 변하는 게 하나도 없는 모습, 크고 작은 거짓말들에 속아 넘어가야 하는 일까지. 혹자는 연애를 시작한 사내아이가 사고 치는 건 기가 막히더라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누구든 부모가 되기 전에 부모 연습을 한 적도 없고, 어른이 되고 나면 자신의 화려했던 사춘기는 모두 잊어버리고 내 자식만은 말 잘 듣고 순한 아이이기를 바란다. 그러니 자식 키우는 일은 기쁨보다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인고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집으로 돌아와 우리 집 세 아이를 보니, 낮에 들었던 지랄 총량의 법칙이 생각났다. 나는 아이가 셋이니 내가 경험해야 할 지랄 총량도 외동을 키우는 친구들에 비해  단순하게 계산해도 세 배가 된다. 이게 뭔 날벼락이람?


나는 자녀들을 축복이라 믿어왔고, 세 아이들이 제각각 세상 속에서 자신의 몫을 한다면 그것은 전 지구적으로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했다. 바쁜 직장맘으로 겁 없이 세 아이를 낳고 키우며 힘이 들어도 그 아름다운 일에 동참한다고 생각하며 나름 기쁨으로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 셋이 지랄 떨 것을 생각하니 앞이 깜깜하고 마음에는 먹구름이 꼈다.


그날, 저녁에 남편과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김없이 세 아이 양육의 어려움에 대해 서로 답답함을 나누게 됐다. 우리 부부에게 어려움은 부모의 잔소리와 감시가 없으면 숙제도 잊고 보드게임에 몰입하는 것, 알레르기로 음식관리가 필요한 둘째가 몰래 해로운 군것질을 하는 것, 본격적으로 사교육을 시작한 첫째를 보며 과연 이렇게 교육하는 것이 남은 둘에게도 옳은 선택일지, 첫째 딸아이가 수영을 그만두면서 체력이 조금씩 약해지진 않을지 등등이다.


세 아이들의 성향에 따라 부모로서 섬세하게 상의해야  할 일들이 참 많다. 사소한 꺼리들도 가짓수가 많아지면 복잡하고, 자녀양육의 효과가 당장 눈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기에 나와 남편은 답도 없는 이야기를 계속 나누며 그저 서로를 지지할 뿐이다.


그날, 남편과의 대화의 결론이 자칫 지랄 총량의 법칙으로 마무리될 뻔했다. 그럴 찰나에 자식을 우는 부모의 마음이 씨앗을 뿌려놓고 꽃 피우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부모는 자식을 키우며 자꾸만 예쁜 꽃, 탐스러운 열매를 떠올린다. 그런 상상과 이미지화는 훌륭한 자녀를 길러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부모로서 자식을 키우는 일이 만만치 않게 느껴지고 힘에 부친다면, 땅 속에 뿌려진 씨앗을 바라보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 같기도 하다. 비바람을 마주하며 땅속에서부터 부단히 성장해 오던 그 생명의 노력을 부모는 간과하곤 한다. 부모는 양분을 주는 자신들의 정성을 곱씹으며, 자꾸만 예쁜 꽃, 탐스러운 열매에 마음을 뺏기고 종종, 때로는 매우 빈번하게 조급한 마음을 갖기도 한다. 나 또한 여전히 설익은 엄마이기에 그 마음조차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부모의 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각자가 감내해야 할 신비의 시간들일지도 모른다. 부모가 그렇게 바라던 예쁜 꽃이 펴서 좋아해도 그것도 한순간이고, 열매를 보려면 꽃잎이 지는 시간도 함께하며 애처롭게 바라봐 주어야 한다. 그 모든 불편한 과정들을 껑충 뛰어넘고, 자식을 키우며 좋은 것만 보자고 든다는 건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다.


세 아이가 부모에게 보여줄 지랄의 총량이 얼마나 남았을지 이야기하다, 나는 남편에게 갑자기 침착한 어투로 씨앗과 꽃과, 열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들의 생명력을 믿어보자며, 아이들을 품에 안고 우리가 쏟아냈던 수많은 축복의 기도들을 기억하자고 했다. 남편도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그 말도  맞다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세 아이를 키우며 복닥거리는 마음에 어떤 날은 혀를 차며 지랄 총량의 법칙을 떠올릴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부모가 되어 매일 조금씩 변하는 아이들의 성장을 감지하며 기대도 하고 실망도 하며, 기쁨과 애통함의 널뛰기를 하더라도 이 모든 과정이 전 지구적으로 아름다운 일이길 바란다. 기어이! 세 자녀를 키우는 이 시간이 부모인 나와 남편에게도 성장의 시간들이길 바란다. 세 아이들 덕분에 우리의 마음결도 한결 여유 있게 빛나게 되길, 부모로서 최선을 다했다며 서로를 칭찬해 주는 날이 오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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