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막내가 되려다 장남이 되어버린, 12살 된 아들 시안이가 살고 있다. 애초에 아이를 둘 정도 낳겠다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잉태부터 출산까지만 해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 계획을 한다고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았다. 임신부터 출산까지 난임에 난산이었던 첫째를 낳고, 16개월 차로 계획해서 낳은 아들이 이 글의 주인공, 시안이다. 연년생을 키우는 게 괴로운 일이건만 첫째가 딸인 덕분인지, 아이들과의 스킨십을 너무 좋아했던 탓인지,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용기가 어디서 났던지 셋째를 갖고 싶은 마음이 들 때쯤 정말 셋째가 선물처럼 찾아왔다. 셋째가 나기 전까지 시안이는 막내였고, 엄마로서 막내에게 향하는 특별한 눈빛과 마음을 시안이에게 온통 쏟았던 기억이 난다.
시안이는 둘이 있을 땐 엄마에게 매우 스윗한 아들이다. 예의 바르고 배려심도 깊어서 내 손에 짐이 있으면 언제나 슬그머니 와서 받아 드는 사랑스러운 아들이다. 희한하게도 아이 셋이 뭉쳐 놀고 있을 때는 제일 장난이 심하고 자기만 안다고 매번 혼이 나는 아들도 시안이다.
어제는 학교에서 숙제로 자유 주제로 글쓰기 숙제가 있어서 한참을 거실 테이블에 앉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었다. 슬쩍 다가가서 무엇에 대해 쓰는가 봤더니, 미래에 자기가 살고 싶은 집에 대한 글이었다. 골몰하며 쓴 글이 마침내 완성되어 읽어봐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자기가 자주 상상했던 자기만의 집에 대한 글이라고 했다.
글을 읽어보니, 시안이가 살고 싶은 집은 300미터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면 자기 방이 있어서 폭신한 침대가 안전하게 받쳐 주는 곳이란다. 거기에는 AI 기반의 멋진 TV 등 영상 장치들이 있고, 그 집에서 새로운 로봇 기술을 개발할 거란다.
글을 읽고 나니, 엄마인 나는 질문이 많아졌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지하로 떨어져 내려가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엘리스가 내 아들 시안이인가 싶기도 했다.
나 : 미끄럼틀이 300 미터면 아래로 길게 만들려면 너는 지하세계에서 산다는 거야? 깊이 땅을 파야겠는데?
시안 : 아니죠. 비스듬히 떨어지면 깊이보다 집의 넓이가 더 중요해요. 저는 넓은 집에 살고 싶어요.
나 : (다행이다. 어둡고 차가울 것 같은 지하에서 은둔형으로 살겠다는 건 일단 아닌가 보다.)
나 : 그 큰 집엔 누가 살아? 너 말고 또 있어?
시안 : 제 집이니까 제가 살죠.
나 : (역시 시안이답다. 강단 있는 내향성에 자기주장이 선명한 아이의 답이란 게 목소리에서도 느껴졌다.)
나 : (다음 날) 그 큰 집에 엄마 방이 없다는 게 좀 서운했어.
시안 : 걱정 말아요. 엄마 집은 다른 데다 엄마가 좋아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줄게요.
나 : (휴~ 다행이다. 어릴 적 부모에게 공수표를 날려 보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으랴? 현실이 되지 않더라도 자녀가 보여준 애정과 큰 포부만으로도 부모는 가슴이 벅차지는 것을.)
누구도 들이지 않는 자기만의 공간을 상상하는 12살 아들이 한편으로는 많이 자랐다 싶기도 했다. 나에게도 상상만 해도 좋은 나만의 공간이 있다. 심리상담가들은 그것을 자궁에 대한 상징화된 이미지라고도 한다. 엄마의 자궁 속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곳에서 느꼈던 안정감이 중요하기도 하다.
나는 시안이가 불현듯 꺼내 놓은 자기만의 집에 대한 상상을 통해 아들의 맘 깊숙한 곳에 있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다 쓰고 나서 그 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아이의 눈빛은 초롱초롱 반짝였고, 즐거운 상상에 신나 있었다. 폭신한 침대의 포근함은 상상만으로도 좋다며 편안해했다.
늘 어리게만 보이던 아이가 쓴 상상의 글 속에서도 엄마인 나는 아이의 진심과 만나고 싶고, 더 깊이 아이를 이해하고 싶어 진다. 이런 나의 궁금함이 시안이에게는 사랑과 관심으로 잘 전달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