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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유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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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Oct 03. 2022

삼겹살을 굽다, 별생각

"뭐 먹고 싶니?"

세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빈번한 답은 

"고기요!"


세 아이 모두 고기를 좋아하는 걸 보면, 식성이 나와는 참 다르다.

첫 아이를 낳고 시작된 우리 부부의 아이 특성 분류하기는 요즘도 계속되는데, 

이런 점은 나를 더 닮았고, 요건 남편, 이건 적당히 섞였다며 아이들의 특성들을 정의해 본다.

근거 없는 부모의 아이 특성 분류는 사실 엄마 아빠로서 아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억지 같기도 하다.

잘 이해되지 않는 아이 특성이 있더라도, 나 아니면 남편의 어딘가를 닮았으려니 생각하면 

설사 한숨이 나더라도 그냥 받아들이게 되니까. 

때로는 남편과 나의 DNA가 만들어 낸 세 아이의 조합을 마주하며 

셋이 아니라 열을 낳았더라도 제각각이었을 것 같다. 

역시 생명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어쨌거나, 고기를 좋아하는 세 아이의 타고난 식성은 남편을 닮은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가끔 엄마가 마음먹고, 소고기를 구워 주셔도 몇 점을 먹는 것이 곤욕이었다.

프라이팬에 고기가 올라가고 지글지글 거리는 동안 풍기는 냄새에 이미 질려 버렸다.


스무 살이 되면서부터 고기에 대한 익숙함을 배워 가기 시작했다. 

회식이든 특별한 식사 자리의 메뉴는 주로 고기였으니, 

고기와 친해지는 것은 사회성 함양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내게 고기란 딱 그 정도의 의미였다.


이런 내게 운명적인 고기 스승이 나타났는데, 바로 첫째 아이다.

지금도 임신과 출산을 떠올리면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입덧이다.

심지어 첫째를 낳을 때는 태반 조기 박리로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응급수술을 했지만,

그 고통보다 잊히지 않는 건 출산 직전까지 니글거리던 입덧에 대한 기억이다.

 

첫째 아이 임신 중 입덧이 유별났던 것은 

그동안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고기의 향연이 내 인생에 최초로 일어났다는 데 있다.

생선 비린내보다 고기 굽는 냄새가 더 싫었는데, 입맛이 완전히 변했다.

첫째 임신으로 입덧을 하는 동안에는 고기 냄새를 맡고, 고기를 맛나게 씹어줘야

울렁거리던 속이 마침내 가라앉았다.


원래 내가 고기를 먹는 방법은 이랬다.

상추 한 장

깻잎 한 장

겉절이도 듬뿍 넣고선

고기는 작은 걸로 딱 한 점을 골라 

참기름까지 발라 겉절이에 파묻는다.

그 위에 다시 마늘을 쌈장에 듬뿍 찍어 올리고

채소쌈에 고기 맛을 숨기며 먹었다. 


그런 내가 임신 중에는 

삼겹살을 구워, 굵은소금에 살짝 찍어 입 안에 넣으면 

고기의 고소한 기름기가 모든 역겨운 느낌을 잡아주고

속을 편안하게 했으니 

임신으로 내 속에서 당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좋아하던 채소는 써서 입에 넣는 것조차 괴로움이었다.


족발집 앞을 지날 때는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숨을 참고 걸었던 내가 

'내일은 기필코 족발!'이라며 감칠맛 나는 족발 냄새를 상상하며 겨우 잠에 든 적도 있다.

어떤 날에는 아침부터 족발을 뜯었는데, 

아침 삼겹살도 마다하지 않았던 남편이지만 아침 족발은 힘들어했다. 

반전 있는 고기 입덧은 참 유별났다. 

나의 모든 기호는 사라지고 뱃속에 있는 아이의 입맛에 모두 맞추는 것 같았다.


첫째 아이 입덧 후에 정말 고기를 좋아하게 되었냐면 그것도 아니다.

출산 후로 모든 입맛은 원래 내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고기를 즐기던 몇 달 간의 유별난 입맛 덕분에

고기를 좋아하는 식구들이 왜 고기를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하며 점심에 먹을 삼겹살을 냉동실에서 냉장실로 옮겨 놓았다.

2주 만에 프라이팬에 고기를 구우며, 나를 위해서는 새송이 버섯 하나와 양파 반쪽을 썰었다.

역시 아이들은 고기들을 가려 먹었고, 나는 내 몫으로 챙겨둔 버섯과 양파에 젓가락이 갔다.


그 많던 삼겹살 한 접시를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린 아이들의 빈 그릇을 정리하며 

문득 첫째 아이 임신 중 했던 고기 입덧이 떠올랐다.

내 입맛이 완전히 변하지는 않았지만,

몇 개월 스쳐갔던 고기사랑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면

삼겹살을 굽는 내 마음이 어땠을까 싶다.

역시 삼겹살은 집에서 먹는 게 아니라며 투털 거리지 않았을까?


너무 좋은 것도, 너무 싫은 것도 없는 그럭저럭인 기호로 살면 어떨까 싶다.

생각과 감정이 요동쳐도 고요하게 흡수하며 살면 어떨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내가 투덜거리지 않고 삼겹살을 굽게 된 것은 참 놀랍고 기특한 일이다.

저쪽 끝에서 중심으로 한걸음 옮겨 온 느낌이다.

이런 걸 균형잡기라 하지 않을까?


나의 면면들이 균형을 잡아 굳건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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