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거북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사건과 기억

by 지저귐

저 언덕 위 숲 속 작은 집에서 토끼 한 마리가 한가로이 낮잠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얼핏 잠에 들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무겁게 일어나 문을 열어보니 발치에 거북 한 마리가 땀을 흘리며 토끼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귀찮은 토끼가 시큰둥하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거북은 비장한 어조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랑 달리기 시합하자!"


같잖은 도전에 어이 없어진 토끼는


"꺼져라!"


하고 문을 닫으려 했지만, 거북이는 다시 한번 요구했습니다.


"나랑 달리기 시합하자니까!"


안되겠다 싶은 토끼는 대답 대신 거북을 발로 뻥 차버렸습니다.


발길질을 당한 거북은 저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며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고는 한 사나흘이나 지났을까...


어스름한 저녁 무렵, 토끼가 식사를 하려는데 다시 누군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저번에 그 거북이 땀을 많이 흘리며 분노 가득찬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토끼가 물었습니다.


"야,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 너랑 달리기 안 한다니까!"


그러자 거북은 토끼를 노려보며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너 지금 나 찼냐?"




서로 다르게 흐르는 ‘기억의 시간’


얼핏 상대성 원리가 떠오르는 이야기입니다. 과학적 맥락이 아닌, 정신적 의미의 상대성 원리.


실제 우주의 시간은 시공간마다 다르게 흘러간다고 하지만, 지구라는 먼지 수준의 공간에선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시간이 똑같습니다.


그러나 지구 생물의 '체감 시간'은 개체의 행위나 심리마다 사뭇 다릅니다.


사나흘이나 지나서 ‘지금 나 찼냐?’고 하는 거북의 항의가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입니다.


거북을 발로 차 언덕 아래로 나뒹굴게 한 토끼는 그 이후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평소처럼 밥 맛있게 먹고 샤워도 하고, 책도 읽고 티비도 보고, 그러면서 즐거움이나 편안함 같은 다양한 감정도 느끼고 이런저런 경험도 하고, 잠도 잘 자고... 토끼의 생활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테죠.


그러나 굴욕과 폭력으로 내동댕이쳐진 거북에겐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진 시간부터 삶이 달라졌습니다.


분함과 치욕감을 누르며 토끼집을 향해 느릿느릿 한걸음 한걸음 언덕길을 다시 오르던 사나흘의 시간이 거북에겐 '지금' 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끼가 이전처럼 일상을 보내는 동안 거북은 오로지 '지금 나 찼냐'는 소심한 항의를 하러 언덕을 오르느라 발에 차인 기억에서 시간이 갇혀버렸죠.




적잖은 사람들이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속담도 하나 떠오릅니다.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못 뻗고 잔다'


과연 이 속담이 현실에 부합할까요? 토끼와 거북에겐 정반대였던 거죠.


거북 입장에서 맞은 기억은 '지금'이지만, 토끼 머릿속엔 때린 기억이 사흘인가, 나흘인가... 정확히 생각나지도 않는 시간입니다.


'더 글로리' 란 드라마가 있었죠. 학교폭력 피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의 전부를 가해자들에 대한 복수 준비에만 쏟아 부은 주인공.


가해자들은 기억도 잘 못해내는데 말이죠.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유명인의 학폭에 대한 과거가 심심치 않게 폭로되고, 그때마다 피해자들의 기억 상태는 오롯이 당한 기억에 머물러 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학폭 외에도 직장 내 괴롭힘이나 사기, 배신, (성)폭력, 스토킹 등등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만큼의 '가해'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가해와 피해의 관계에서는 '맞은 기억은 지금이지만, 때린 기억은 발 뻗고 잘 만한, 먼 옛날로 치부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고통, 굴욕, 모욕, 치욕, 상처, 멍, 아픔, 억울함, 울분, 그리고 '한'...이런 단어들의 '심리적 시제'는 가해자에겐 과거형이지만, 피해자들에겐 현재진행형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일본의 노쇄한 군인들의 체감 시간도 아마 100년 가까이 차이가 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맞은 놈은 발뻗고 자도 때린 놈은 못뻗고 잔다는 속담도 지금 시대엔 헛된 소리로 들립니다.


토끼와 거북의 시간은 완전히 다르게 흐르기 때문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