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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받고 남의 일기 읽기

어떻게든 잘살아보려는 대학원생의 고분군투

by 소주인

막 박사과정에 들어간 시점, 돈 없고 시간 많은 대학원생은 출근 안 하고 할 수 있는 일 하나를 제안받았다. 국학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스토리테마파크에 올릴 원고를 쓰는 일. 국학진흥원은 영남 지역에서 쓰인 조선시대 일기를 컨텐츠 제작을 위한 소스로 제공하기 위해 일기를 1차적으로는 탈초, 번역한 뒤 2차로 가공하여 스토리테마파크라는 이름의 웹사이트(http://story.ugyo.net/front/index.do)에 싣고 있다.


내가 맡은 일이 2차 가공이다. 번역된 일기를 쭉 읽어보면서 흥미로운 일기가 있으면 전후맥락을 살펴보고 여러 날의 일기를 묶든, 혹은 관찬사서나 동시기 다른 사람의 일기의 내용으로 부족한 사실관계를 보충하든 해서 완결된 하나의 사건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이다.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일이다.

우선 쉬운 점을 이야기해 보자면 하나하나 각주를 안 달아도 된다는 점. 그리고 조금 양념을 쳐도 된다는 점 정도가 있겠다. 어려운 점은 개인의 일기이다 보니 등장하는 인물들이 누가 누군지 일일히 조사를 해 봐야 한다는 점, 그리고 사건 정보가 상세하지 않다는 점, 또...활동량이 적은 인물인 경우 도저히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고 자시고 할 건덕지가 없다는 점 정도가 있겠다.


어쨌든 돈 받으면서 남의 일기를 읽는다는건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다. 돈 안 받으면 누가 앉아서 남의 일기를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몇십년 분량을 읽고 있겠는가. 일기 쓴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심한 경우 몇십년간 매일 해 뜨면 책 읽고 해 지면 술마시고 매달 제사지내고 하는게 일기 내용의 거의 전부인 경우도 있다. 이런 일기는 아무래도 읽으면서 하품이 나긴 한다. 조선시대 일기는 자손이 읽게 될 것을 염두하고 쓰인 것이기 때문에 아주 내밀하고 개인적인 사건이나 감정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섬세하게 일상을 적어내린 기록이기에 오늘날 읽었을 때 조선시대의 일상 속에서 새롭고 신기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관찬사서가 한 시대의 흐름이 담긴 거대한 강물이라면, 일기는 개인의 일상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개울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큰 비가 오면 강물도 불고 개울물도 불어나며, 가뭄이 들면 강물도 마르고 개울물도 마른다. 국가와 한 시대의 분위기가 개인의 일상에 미친 영향이 어떠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 역시 일기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공부를 하면서 생활사나, 풍속 같은 부분을 접해볼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 알게 되는 점도 많았다. 디테일이 주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2018년부터 지금까지 세 사람의 일기를 읽었다. 예안에 거주했던 광산 김씨인 김광계의 <매원일기>, 안동에 거주했던 봉화 금씨 금난수의 <성재일기>, 그리고 선산에 거주했던 경주 노씨 노상추의 <노상추일기>. <매원일기>는 중간부터 작업에 참여했던 것이라 김광계가 55세였던 1635년의 일기부터 64세가 된 1644년 일기까지 읽었다. <성재일기>는 금난수가 31세였던 1560년의 일기부터 시작하여 사망하는 1604년까지 전체 일기를 읽었다. 그리고 <노상추일기>는 노상추가 18세 되던 해인 1763년부터 읽고 있는 중이다. 내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국역 노상추일기>가 완역되어 홈페이지에 게시될 예정이다. 일단은 지금 번역되어 있는 것 중 1796년까지를 읽었다.


각 일기마다 나라의 큰 일들이 언급되고, 특히 <매원일기>에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성재일기>에서는 임진왜란이 삶을 덮친다. 정묘호란을 맞닥뜨린 김광계는 노구를 이끌고 의병장으로 나서며(금세 돌아오기는 한다), 금난수는 군자금을 대는 한편 왜군을 피해 가족들을 데리고 산 속에 숨는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조보를 더 이상 받아볼 수 없게 된 지방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 의병으로 자기 이름을 걸고 대신 노비를 내보내는 사람들의 모습도 생생하게 나타난다. 전후, 전쟁으로 지인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명절에 모여 눈물을 떨군다.




조선시대 일기의 매력을 이렇게 그냥 일로만 넘기는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짬짬이 작업물들 중 흥미롭고 기억에 남았던 것들을 뽑아 정리해 볼까 한다. 구체적으로 정해놓은 목차나 체계는 아직 없지만, 일단 거칠게 글묶음을 잡아볼까 한다.


A묶음: 허랑방탕한 일상-술, 유흥, 유람...

B묶음: 일상의례와 관습-공식적인 의례와 사적인(암묵적인) 룰

C묶음: 국가의 대사건과 개인의 삶

D묶음: 여성의 삶


생각나는 대로 묶었을 때는 이정도가 될 것 같다. 먼저 작업했던 순서대로 <매원일기>, <성재일기>, <노상추일기> 순으로 글을 올리고, 추후에 주제별로 카테고리화 해 보려 한다.

기존에 작업했던 원고를 분해하거나 합치거나 혹은 수정해서 한 개 한 개 올릴 예정인데, 일단은 스토리테마파크에 올려놓은 원고를 하단에 링크로 걸어놓을 것이다.(허락 받음) 공부가 부족해서 잘못 썼던 부분은 고치고, 추가해야 할 내용은 추가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류나 부족함이 있다면 너그러이 봐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일단 전공이 아닌 것을 닥치는대로 공부하면서 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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