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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원일기>의 세계

욕심없는 시골양반의 전원일기

by 소주인

<매원일기>를 쓴 김광계(金光繼)는 1580년(선조 13)에 태어나 1646년(인조 24)에 향년 67세로 사망했다. 본관은 BTS 멤버 중 몇몇 덕분에 요즘 한창 각광받고 있는 광산(光山)이다. 김광계의 호는 매원(梅園)이며, 자는 이지(以志)이다. 부친은 김해(金垓)이며, 모친은 퇴계 이황의 조카 이재(李宰)의 딸이다.



김광계의 집안은 경상북도 안동의 예안에서 농업을 기반으로 생계를 꾸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김광계의 조부 김부의는 그의 형 김부필과 함께 퇴계 이황 문하에서 수학한 유학자였다. 김부의는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벼슬살이는 하지 않았다. 김광계의 부친 김해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수찬까지 지냈다. 하지만 김광계는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급제하지 못하고 음관직을 받았다. 그래도 조부가 퇴계의 제자인데다가 부친대에 관직을 지냈으므로 지역사회에서는 예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광계에게는 위로 두 명의 누나와 아래로 세 명의 남동생, 그리고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다른 형제들은 슬하에 자녀를 두었으나, 유독 장남인 김광계는 자손을 얻지 못하여 바로 아래 동생인 김광실의 아들 김렴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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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계의 재산 규모는 1601년과 1620~30년에 작성된 화회문기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1601년 화회문기(http://jsg.aks.ac.kr/dir/view?dataId=ANC_G002+AKS+KSM-XE.0000.0000-20101008.B001a_001_00304_XXX)에 기록된 김광계의 상속분을 보면,



장자 광계(光繼)의 몫


신노비질

…(원문 결락)… 노 한풍(漢豊), 26세.

…(원문 결락)… 향(香), 27세.

비 순이(順伊) …(원문 결락)… 순생(順生), 22세, 경진생.

노 덕룡(德龍)의 첫째 노 덕복(德卜), 17세, 을유생(乙酉生).

비 연분(連分)의 셋째 비 연월(連月), 31세, 신미생(辛未生).

비 한지(漢之)의 셋째 비 은학(銀鶴), 22세, 경진생.

노 산석(山石)의 첫째 비 춘월(春月), 20세.

노 향복(香福)의 첫째 비 금분(今粉), 18세, 갑신생(甲申生).


예득질

…(원문 결락)… 희종(希從), 52세, 정미생(丁未生).

…(원문 결락)… 덕룡, 36세, 병인생(丙寅生).

비 은금(銀今)의 첫째 비 은지(銀之), 35세, 정묘생(丁卯生).

비 권금(權今)의 첫째 비 권춘(權春), 33세, 기사생.

비 여생(如生)의 첫째 비 여금(如今) 5세, 정유생.

비 송덕 소생.

남양의 비 만지의 둘째 노 명복, 40세, 임술생(壬戌生).

…(원문 결락)… 넷째 비 막대(莫代), 28세, 갑술생(甲戌生).

…(원문 결락)… 년(年) …(원문 결락)… 비(婢) …(원문 결락)… 난대(難代), 나이.


전답질

희경(希京) 집 앞의 밭 1섬지기[石落只].

거인의 강자(羌字) 아래쪽 밭 8마지기.

늦구곡[芿叱仇谷]의 신자(臣字) 밭 4마지기.

…(원문 결락)… 봉손(奉孫)의 밭 3마지기.

…(원문 결락)… 마지기.

…(원문 결락)… 논 10마지기.

…(원문 결락)… 저동(楮洞)의 논 7마지기.

거인 정전(井前)의 논 8마지기.

고음산(古音山)의 논 6마지기.

후동(後洞) 위의 논 4마지기.

예안(禮安) 남며(南旀)의 융자(戎字) 논 위쪽 6마지기.

…(원문 결락)… 외자(外字) 논 28부 9마지기.

당자(棠字) 밭 19부, 25부, 합하여 10마지기.

화자(和字) 31번 논 6부, 29번 논 9부 5속.

선산에 있는 제궁 들 법파(法波)의 논 8마지기.

같은 들 지하(池下)의 논 6마지기.

남양에 있는 이수(梨樹) 들 오자(吳字) 논 10부.

같은 들의 열자(列字) 논 2부 1속.

…(원문 결락)… 구을우금(九乙禹今) 들의 용자(容字) 밭 5부, 또 그 아래 2속, 합하여 8마지기.



1601년에 미처 나누지 못했던 재산은 1620년~30년에 다시 분급(http://jsg.aks.ac.kr/dir/view?dataId=ANC_G002+AKS+KSM-XE.0000.0000-20101008.B001a_001_00304_XXX)된다. 김광계에게 상속된 노비와 전답을 보면,


장자(長子) 광계(光繼)의 몫


전주의 비 부허비의 첫째 노 수허리(守許里), 나이.

노 유선(有善)의 둘째 비 춘난대(春難代), 32세.

비 종이(終伊)의 둘째 노 유선, 66세.

함경도의 노 순옥(順玉)의 첫째 노 난수, 57세.

노 학수(鶴守)의 첫째 비 대금(大今), 40세.

노 학봉(鶴奉)의 첫째 노 암석(岩石), 36세.

노 계원의 둘째 비 봉황대(鳳凰代), 19세.

비 애춘(愛春)의 둘째 노 가일(加一), 19세.

비 담대의 첫째 비 득화(得花), 나이.

비 물십사이의 둘째 노 생춘, 나이.

비 언복(彦卜)의 첫째 비 금이복(金伊卜), 나이.

비 기림복의 첫째 비 복이(卜伊), 나이.

도망 노 순근(順斤)의 다섯째 비 지련대(之連代), 나이.

연안의 비 검대의 셋째 노 단복(丹卜), 나이.


추득논상질(推得論賞秩)

함경도의 노 독동(禿同)의 첫째 비 연양대, 36세.

노 석산(石山)의 첫째 비 복이(卜伊), 35세.

비 애춘의 첫째 노 옥돌시(玉乭屎), 17세.


전답질

풍산 도양동 행랑(行廊) 아래 텃밭 1섬지기.

예안(禮安) 보현(甫峴)의 번전(反田) 안의 5마지기.

풍산 도양동 끗동[末叱同]의 밭 3마지기.

{첨지: 약자(若字) 49번 밭 4부 4속, 50번 밭 2부 8속, 경작자 대손(大孫)}

예천 백송 들의 15번 3등 논 4마지기.



이렇게 긴 목록을 보면 노상추의 넉넉한 집안 형편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마지기는 한 말의 씨앗을 뿌려 평균적으로 벼 4가마를 수확할 수 있는 면적 정도를 말한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 다른데, 논의 경우에는 200평을 1마지기, 밭의 경우에는 300평을 1마지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김광계가 상속받은 밭은 누락된 기록과 1마지기에 못 미치는 면적을 제외하고 대강 계산해도 약 30부(34,629㎡) 32마지기(31,735㎡)이며, 논은 55부(8486.5㎡) 78마지기(51,570㎡)이다. 다시 평으로 환산하면 밭은 약 20,075평이며 논은 약 18,167평이다. 계산하고 보니 면적이 너무 넓어서 이 계산법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노비 수만 해도 누락된 기록을 제외하고 세면 31명에 달한다.


여기까지만 살펴보아도 김광계가 얼마나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지 안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김광계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위한 군자금을 댈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긴 전쟁으로 인해 굶는 사람이 속출하고, 심지어 양반들도 굶고 있었을 때에도 김광계는 식구들을 굶기지 않을 수 있었다.





김광계가 살던 예안은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영주, 봉화와 연결되어 있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안동과 예천이 연결되었다. 일기를 읽다 보면 길게 뻗은 낙동강에 띄운 배가 주된 교통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 덕에 예안 지역의 농토는 기름졌고, 풍광이 아름다워서 살기에 좋았던 것 같다. 이 지역에서 배출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단연 퇴계 이황이다. 퇴계가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을 짓고 후학을 양성한 덕에 이 지역에서는 유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지금 이 부근은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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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계는 과거를 보러 갈 때 이외에는 평생 집 근처를 떠나지 않고 살았다. 친척들이나 지인들도 거의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기에 교류를 위해서도 그리 멀리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성격도 밝고 명랑하기 보다는 진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평소 배탈이 잦고 잔병치레를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인생에서는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잘 발견되지 않는다.


그 본인도 음관이나마 지내면서 서원 원장자리도 받았으니 양반 타이틀을 지키는 데 문제는 없었다. 집안형편도 넉넉했고,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을 낳지는 못했으나 양자를 얻었으니 집안관리는 모두 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가끔 술 마시고 유람다니는 편안한 노후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기는 하지만 그는 적병을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의병장으로 나서기는 했으나 정묘호란 때는 병 때문에 전장에는 발을 들여놓지도 않고 돌아왔고, 병자호란 때는 진군하려고 하는데 이미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저 통곡하기만 했다. 전쟁 소식도 다 소문으로만 들은 것이다.


싱겁고도 평화로운 인생을 살았기에 김광계의 <매원일기>는 그리 재미있는 일기는 아니다. 하지만 천천히 읽다 보면 김광계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소하고 바보같은 사건들이 소소한 즐거움을 주곤 한다. 순진하고 욕심없는 시골 양반이 쓴 전원일기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매원일기>는 특히 같은 시기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비교하며 읽으면 더욱 재미있다. 중앙에서 뚝 떨어진 별세계에 사는 것 같은데, 특히 병자호란 전후시기 급박하게 돌아가는 조정의 상황과 비교해 보았을 때 김광계는 과연 같은 나라에 사는 것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정세와는 철저히 괴리된 삶을 살아간다. 조선후기 경-향분기의 조짐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괴리에서 재미를 찾아보기 위해 같은 시기의 <인조실록>을 참고하였다. 서울에서 예안까지 소식이 전해지는 데에는 평균적으로 5~10일 정도가 걸린 듯한데 이를 감안하여 앞뒤 날짜의 기사도 같이 참고했다.





내가 맡아서 읽은 <매원일기>는 김광계가 55세 되던 해인 1635년부터 64세가 되던 1644년까지이다. 노후의 일기라서 그런지 일기 내용이 소략하다. 그래서 같은 시기 한 동네에 살면서 김광계와 교류하고 있던 김광계의 재종숙 김령의 일기인 <계암일록>을 참고하여 내용을 보충하였다. 김령은 한때나마 서울에 올라가 관직생활도 했고, 그 아들들도 관직에 나아갔기 때문에 김광계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일기 <계암일록>은 같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내용이 훨씬 풍부하다.


그래서 <매원일기>를 좀 더 재미있게 뜯고 씹고 맛보기 위해서 아래의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볼까 한다.


1. <매원일기>를 읽는다.

2. <계암일록>의 같은 날짜 일기와 비교하여 <매원일기>의 소략한 내용을 짐작하거나 보충한다.

3. <인조실록>의 앞뒤 열흘 기사를 비교하여 당시 정세가 김광계의 생활에 미친 영향을 찾거나 혹은 극심한 괴리를 발견한다.

4. 문득 생각난 최근 사회이슈들이나 나의 경험을 함께 적어본다. 혹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당대를 평가한다는 것이 매우 불합리하지만)김광계와 당대인들에게 못마땅한 점을 적는다.


그럼 이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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