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에 편승해보자
1795년 3월 6일-노상추 50세
3월 초6일(병진) 흐림.
권필도權必度【경능景能】가 와서 이야기하고, 영장 장화심張華深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이번에 들으니, 노론老論에는 벽파癖派와 시파時派가 있는데, 벽파는 정승 김종수金鍾秀, 지금 좌의정인 재상 유언호兪彦鎬, 지금 이조 판서인 판서 윤시동尹蓍東, 지금 병조 판서인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그 영수領袖라고 한다. 그 밖에는 모두 시파인데, 재상 김이소金履素, 재상 이병모李秉模, 판서 서유린徐有隣·서유방徐有防 형제, 판서 서정수徐鼎修가 영수라고 한다. 소북少北인 문관文官 이현도李顯道가 상소로 시파를 배척했다가 금갑도金甲島에 정배되었는데, 특교特敎로 명한 것이다. 들으니, 시중에 떠도는 〈백화당가사白華堂歌詞〉는 시파와 소론의 이름과 자字 중에서 자字를 가지고 가사를 지은 것으로서 거론된 사람이 수없이 많다고 한다. 그들이 정동준鄭東浚의 연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모두 몰아서 지목하여 배척했다고 하는데, 남인南人은 한 사람도 들어간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반드시 모두 정동준의 무리가 아닌데도 모두 배척했으니, 괴이하다.
2022년 1월 14일
요즘 한창 인기를 구가하는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은 정조대를 배경으로 한다. 복잡한 정치상황 속 젊은 왕의 비애와 사랑...! 그것도 심지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실화 바탕!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뭐 계산했던 것은 아니지만 읽던 일기가 마침 정조대에 쓰인 일기라서...키워드로나마 시류에 편승해 보려고 이야기를 꺼내 본 것이다.
그나저나 정조의 비애는 이미 다들 알다시피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시작된 것. 임오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동정하는 입장을 가지느냐, 아니면 사도세자가 죄인이니 그 아들도 죄인이라는 입장을 가지느냐에 따라 조정도 나뉘었다. 동정론은 일단 남인이 가지고 있었고, 또한 노론 중에서도 동정론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시류를 따른다는 의미로 시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왜 시류냐면 무엇보다도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었으니까. 사도세자의 사사를 묵인했던 사람들은 벽파라고 불렸다. 궁지에 몰렸다는 뜻의 벽(僻)자를 쓴 것. 시파든 벽파든 그 스스로가 이 호칭을 쓰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양쪽 다 아주 멸칭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입장은 그냥 명분이었던 것 같다. 전 왕인 영조대부터 지난하게 이어져 내려오던 탕평책과 관련한 입장차가 이미 기저에 깔려 있는 채였다. 다만 워낙 드라마틱한 사도세자의 죽음과 그 아들의 즉위가 파당을 표면적으로 드러내 준 것이다.
노상추는 스스로 남인이라는 자각을 명백하게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자신이 무과급제 후 변변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한 것도 자신이 영남 남인이어서 그런 것이라는 피해의식(사실이었을 가능성도 높다)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비록 무관이라서 당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위치는 아니었지만 세 명만 모여도 정치 이야기를 한다는 조선 사람답게 정치에도 꾸준히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1795년(정조 19) 3월 6일 일기에는 노상추가 노론이 시파와 벽파로 나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시파와 벽파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전에는 구체적으로 시파, 벽파라는 호칭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노상추가 들은 바에 따르면 벽파의 영수는 김종수, 유언호, 윤시동, 심환지라고 하며 시파는 김이소와 이병모, 서유린, 서유방, 서정수가 영수라고 한다.
이 일기가 쓰이기 2달 전인 1월, 권신 정동준이 탄핵을 받고 음독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정동준은 뇌물을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정동준의 권세를 따르는 사람이 당파를 막론하고 아주 많았던 모양이다. 정동준 사후인 3월, 시중에는 <백화당가사>라는 노래가 떠돌고 있었다. 이 노래는 시파와 소론 인물들의 자(字)를 따서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정동준의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권세를 누리다가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한 권신의 연회에 참석한 인물들의 자로 지은 노래. 일종의 살생부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의 과도한 해석일까? 이 노래가 벽파에 의해 지어졌고, 정동준 스캔들로 시파와 소론 인사들을 한데 엮어 공박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노상추는 같은 해인 1795년 11월 13일 일기에서 시파와 벽파를 다시 언급하며 "사특한 세력과 올바른 세력이 서로 상소를 올리면서 공격하고 있지만 미동 대감(채제공, 남인)만이 홀로 우뚝하게 서서 동요하지 않으므로 한 시대의 추앙을 받고 있다" 라고 썼다. 정치 판국을 선악구도로 파악했다는 점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