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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군이 되려면 말을 바치라고요?

1796년 12월 22일~25일

by 소주인

1796년(정조 20) 12월 22일~25일-노상추 51세


12월 22일(계묘) 볕이 나고 추위가 매우 심함.

5일간의 추위는 참으로 혹독한 추위였다. 새벽에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였다. 내일 인정전에 친히 납시어 향香을 전달하겠다는 명을 내리셨는데, 모레가 납향臘享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금군 별장이 취재에 뽑힌 금군에게 이날까지 말을 바치라는 명을 내렸다가, 또다시 25일까지 기한을 미룬다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들으니, 선전관 정여익鄭汝益이 오늘 출발하여 고향에 돌아간다기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하였다. 먼 길을 걸어서 가야 하니 걱정스럽다. 또 새로 제수된 개천价川 수령 신선응申善應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12월 24일(을사) 볕이 나고 추움.

우후 이현보李顯甫 령令에게 가서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말을 아우 영중英仲이 금군으로서 스스로 갖춰서 바칠 말로 살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이에 70금金을 먼저 주고, 나머지 50금은 나중에 주기로 약속하였다. 부장 장지원張趾元, 참군 장동옥張東玉, 선달 권필도權必度, 칠원漆原 수령 성언림成彦霖, 감찰 장언극張彦極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석사碩士 정재균鄭載均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전관 정유관鄭惟寬이 찾아왔다. 들으니, 그 아우 정필수鄭必秀 형묘가 오늘 늦게 출발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다.


12월 25일(병오) 볕이 나고 추운 기운이 조금 줄어듦.

이날 일찍 동소東所에 입직했는데, 부장은 김성진金聲振이 입직하였다. 북소北所의 위장은 허원許瑗이 입직하고, 부장은 최명주崔命柱가 입직하였다. 김성진은 평양平壤의 중인中人이며, 최명주는 도성 내의 중인이다. 모두 수문장으로서 출륙出六하여 이번에 새로 참상이 되었다. 허원은 함경도 종성鍾城 사람으로서 전임 첨사였던 사람이다. 이날 밤 군호는 ‘임양臨陽’ 두 자로 내리셨다. 나는 3, 4경(오후 11시~오전 3시)에 순찰하였다. 이날 영중英仲이 무사히 말을 바쳤으며, 선달 권사억權師億과 한량 박기석朴基碩도 말을 바치고 물러나왔다고 한다.



2021년 1월 29일


비록 석사 때 조선후기를 전공으로 하긴 했지만 조선후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군사 관련으로는 문외한이다. 그래서 <노상추일기>를 읽으면서 새로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물론 일을 하면서 보는거라 여전히 공부가 부족한 상황.

일기가 매력적인건 연구서에도 나오지 않는 관습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금군 취재 방법과 운영 방법에 대한 연구들은 있지만 금군으로 뽑힌 사람들이 어떻게 실제 근무를 시작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역시 일기같은 생생한 자료를 봐야 한다.

노상추의 동생 노상근은 1753년생으로 무과에 합격한 1795년에는 이미 43세였다. 종가에 양자로 들어가서 종손으로 사느라 인생이 바빠 늦게서야 무과 준비를 시작한 탓이다. 무과에 합격한 뒤 1년간 특별한 직책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1796년에 금군 취재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집안이 원체 가난했기에 고향인 선산에서부터 말 한 필을 세 사람이 나눠 타며 관직을 얻으러 올라온 신세였으나 목적을 달성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1796년 11월 16일에 병조판서가 모화관에서 선천 금군 취재를 열었고, 노상근은 철전 3발과 기추 1발을 명중시키고 강(講)에서 조(粗)의 성적을 받아 합격하였다.

합격은 했으나 남은 근심이 있었다. 취재에서 뽑힌 금군은 본디 기병이었기에 금군 별장에게 말을 한 마리씩 바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말 한 마리를 세 명이서 돌아가며 타고 올라온 신세인 노상근에게는 아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말을 함께 타고 온 세 명중 한 명은 끝내 관직을 얻지 못하고 다시 걸어서 고향에 돌아갔다.) 금군 별장은 12월 22일까지 말을 바치라는 명을 기존에 내렸으나, 아무래도 노상근과 마찬가지로 곤궁한 처지의 합격자들이 많았던 것인지 12월 25일까지로 기한을 늘려 주었다.

원래 기한이었던 22일까지 말을 마련하지 못했던 동생을 위해 노상추는 말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서울에 오래 살았고 관직에도 오래 있었기에 노상근보다는 노상추가 변통하기 더 좋았을 것이다. 노상추는 같은 영남 출신인 이현보에게 찾아가 노상근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리하여 이현보는 120금에 자신의 말을 노상근에게 팔아 주기로 약조하였다. 하지만 그만한 돈도 없었기에 일단 70금을 먼저 주고, 나머지 50금은 마련되는 대로 나중에 주기로 했다. 말을 바쳐야 하는 기한 하루 전에 아슬아슬하게 말을 마련한 것이다.

노상근은 마침내 25일에 금군 별장에게 무사히 말을 바치고 어렵사리 금군이 되었다.


*추가


금군이 말을 바치게 된 경위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원래는 관의 말을 금군에게 지급해 주었는데 금군이 관마를 사적으로 유용하는 일이 잦아서 아얘 자기 말을 가지고 와서 타도록 한 것인가보다.


"(...)관마를 바꾸어 주는 일도 당연히 금지해야 되는 것인데, 시골에 사는 금군들이 날마다 관마를 부려서 삯을 받고 짐을 실어 나르다가 병들어 힘이 다하면 서울에 사는 금군의 관마와 값을 따져 바꿔치기를 하니, 어떻게 말이 야위어 못쓰게 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는 금군의 번을 바꾸는 것과 관마를 바꾸어 주는 것을 일체 금한다. 1. 금군에게 지급하는 관마에 대해서는 원래 정해진 규정이 있는데, 근년 이래로 마음 내키는대로 농간질을 한다. 금군의 속임에 넘어가 외람되이 주고, 염초(焰硝)를 불법으로 바꾸어내는 것도 그대로 받아주는 일이 숱하여 혼란하기 그지없다. 겨우 일일이 조사하여 자신의 말로 바꾸어 바치게 하였으나 앞으로 이런 폐단이 절대로 없으리라고는 보장하기 어렵다. 반드시 불시에 점검하여 마안(馬案)을 대조해서 만일 사적으로 바꿔치기하여 털빛이 서로 다르면 해당자는 엄히 곤장을 쳐서 도태시키고 정(正)과 영(領)도 죄를 준다."(<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 9월 16일 병오)

<금군절목> 중 납마에 관한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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