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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내로남불

결코 상사로 두고 싶지 않은 사람

by 소주인

병진일기 1796년(정조20)-노상추 51세


12월 27일(무신) 볕이 남.

이날 계속해서 입직하였다. 진시(오전 7~9시) 말에 병조의 하례가 와서 입직하여 시위하기를 독촉하므로 급히 협양문協陽門 안으로 나아갔다. 시위는 아직 다 모이지 않았다. 이때 바로 들으니, 숙장문肅章門에 전좌하여 친국親鞫을 거행한다고 하는데, 시위 반열을 돌아보니 병조 판서가 들어오지 않아서 괴이하였다.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가 되자 숙장문에 전좌하셨고, 시위는 전원이 반열에 참여하였다. 잠시 뒤에 죄인이 몽두蒙頭를 덮어쓰고 칼을 쓰고 차꼬를 찬 모습으로 시위 반열 사이로 붙잡혀 들어왔다. 그런데 몽두를 벗기니 병조 판서 정호인鄭好仁이었다. 또 붙잡혀 들어왔는데 몽두를 벗기니, 이조 참의 성덕우成德雨였다.

『명의록明義錄』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데도 의리에 배치되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명의록』에 본래 들어있는 의리에 따른 형률을 시행한다는 뜻으로 문목問目을 내어 심문하고 초사招辭를 받았다. 그런데도 그들이 초사를 바칠 때에 매우 모호하게 말하였다. 정호인은 초사를 바치기를, “의리에 배치되게 행동한 것은 본심이 아니며, 잘못 알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다. 성덕우는 초사를 바치기를, “하례가 승정원의 분부를 받고 일을 행하다가 그르쳐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며, 의리에 배치되게 행동할 마음은 본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칼을 풀고 형신刑訊을 10차례 가하였다.

임금께서 하교하시기를, “오늘의 거조는 만세에 이런 일을 막는 기준이 될 것이니, 형조刑曹와 전옥서典獄署에 분부하여 정형正刑을 행할 도구를 속히 준비하게 하라. 이어서 또다시 엄히 문초하고 심하게 다그쳐서 의리에 배치되게 행동했다는 내용의 공초를 바치게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의금부 낭청과 판의금부사가 이런 뜻의 공초를 바치도록 압박하며 다그치고 있을 때에 또다시 하교하시기를, “다른 사람이 협박한다고 해서 받아들인 것이 잘못이니, 너의 본심에 의리에 배치되게 행동하려는 마음이 정말로 없었겠는가? 그러므로 저절로 괴팍하고 모난 처사가 되어버린 것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저절로 괴팍하고 모난 처사가 되어버렸다.’ 라는 말로 공초를 바치라.”고 하시니, 두 죄인이 모두 ‘저절로 괴팍하고 모난 처사가 되어버렸다[自歸崖異]’라는 네 글자로 다짐[侤音]을 바쳤다.

정호인에게는 형신을 더 가하지 않고 곧바로 유배를 보냈다. 정호인은 온성穩城에 유배를 보내고 성덕우는 진도군珍島郡의 금갑도金甲島로 유배를 보냈다. 정鄭은 나이가 69세이고 성成은 나이가 65세인데 초사를 바치게 되었다. 날이 저물자 전좌를 마치고 임금께서 대내로 들어가셨다.

대강의 내용을 상세히 들으니, 다음과 같았다. 며칠 전에 성덕우가 이조 참의로서 제관祭官을 차임할 때에 홍수영洪守榮을 제관에 차임했는데, 홍수영은 홍낙임洪樂任의 아들이다. 홍낙임은 봉조하 홍봉한洪鳳漢의 아들로서 왕실의 외척인데, 홍낙임은 병신년(1776)의 대역적 홍계능洪啓能의 수하手下 노릇을 했기 때문에 『명의록』에 역적으로 들어 있다. 그런데도 임금께서 홍수영을 특별히 제수하기도 하고 또 이번에 장용영 종사관에 임명하기도 한 것은 자궁慈宮을 위로하는 효심에서 행한 조처였다. 그러니 조정에서 무턱대고 제관으로 임명한 것은 명의明義에 반하는 행위였다.

병조 판서 정호인은 황력皇曆을 반사頒賜하는 날을 맞아서 군직을 초계抄啓할 때에, 홍낙임과 이면식李勉植 두 사람을 추가해서 넣었다. 이면식이란 자는 이명식李命植의 아우인데, 병신년에 전위傳位하실 때에註 005 홍인한洪麟漢의 지휘를 받아서 전교傳敎를 쓰지 않은 승지였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죄명이 모두 『명의록』에 들어 있는 것이다. 조정에서 의리를 굳게 지키는 일은 신하의 분의로 볼 때에 엄정하게 거행해야 하는 것이므로, 정호인과 성덕우가 행한 일은 승정원에서 배척하였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 일을 스스로 맡아서 처리했기 때문에, 결국 승정원에서 상소하여 그들의 죄를 성토하여 국문을 하면서 죄를 다스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 통탄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있겠는가. 이날 밤의 군호는 ‘경엄警嚴’ 두 자로 내리셨다. 3, 4경(오후 11시~오전 3시)에 순찰하였다.



2022년 1월 28일


69세와 65세의 두 늙은 고관들을 하루아침에 죄인으로 만든 <명의록(明義錄)>은 정조가 세손이던 시절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을 역적으로 칭하고 사사한 일의 전말을 적은 책이다. 동시에 정조를 옹위했던 홍국영(洪國榮)·정민시(鄭民始)·서명선(徐命善)의 충절을 기리는 책이기도 하다.

이조참의 성덕우는 제관을 차임할 때 홍수영을 차임하였는데 홍수영 그 본인은 별 잘못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 부친인 홍낙임이 <명의록>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정조는 홍수영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고, 장용영 종사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모친인 혜경궁 홍씨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자기 외가를 역적이라 몰아 박살낸 아들이 새삼 홍수영에게 벼슬을 줬다 한들 혜경궁이 기뻐했을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정조가 이렇게 홍수영을 따로 챙기는 모습을 보고는 성덕우도 일부러 홍수영을 제관 차임에서 배제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또 왕이 일부러 챙기기까지 하는 사람을 일부러 배제하기란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 입장에서는 자기는 왕이니까 <명의록>에 올라 있는 역적 명단을 무시할 수 있지만 일개 이조참의가 <명의록>을 무시하는건 건방진 일로 느꼈을 것.

병조판서 정호인도 비슷한 경우이다. 마찬가지로 <명의록>에 올라 있는 홍낙임과 이면식을 군직을 초계할 때 명단에 넣은 것이다. 이면식은 <명의록>에 올라 있는 이명식의 아우였다. 정호인은 잘 모르고 그랬다며 변명했지만 그런 변명이 통할 리가 없었다. 성덕우는 그에 비해 좀 더 치사한 변명을 한다.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하례가 승정원의 명령을 받아 일을 하다가 잘못 처리했다는 것. 이런 변명 역시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정호인과 성덕우는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일단 정조가 역적들한테 먼저 잘해주고 있었으니까. 내로남불이란 말은 여기다 쓰는게 맞겠다.

어쨌든 정호인과 성덕우를 벌함으로서 본보기를 세우고 싶었던 정조는 두 사람의 나이나 지위에도 상관 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친국하고 형신을 가한다. 그리고는 멀리 유배를 보내 버린다.

이후의 일이 궁금해서 실록을 좀 더 보니 정호인은 1797년 12월에 석방되고, 성덕우는 1798년 11월에 석방된다. 1798년 2월, 행차를 하다가 길가에서 우연히 정호인을 본 정조는 정호인을 궐에 불러들여 인사를 시키라고 명한다. 진짜...너무하는거 아니냐. 나 같으면 역심이 끓어올랐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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