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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도 못 쇠는 역병의 나라 조선

코로나 시대 설맞이 특집

by 소주인

1798년-노상추 53세

12월 28일(정사) 볕이 남.

들으니 주인의 딸아이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어서 회동晦洞의 장군박張君博 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근래 돌림병이 감기와 비슷하지만 감기는 아니다. 아픈 사람이 사방 천지에 있다고 할 만하고, 죽는 사람이 잇따르므로 대신과 경재卿宰도 많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


12월 29일(무오) 흐리고 추움.

회동晦洞에 머물렀는데, □…□ 4일 동안 크게 아팠으니 천연두 증세가 아니겠는가! 염려가 된다.


12월 30일(기미) 볕이 남.

회동晦洞 주인이 □…□ 부득이 또다시 문여집文汝緝의 주인집으로 돌아갔다. 이날은 섣달그믐이지만, □…□ 조금도 설을 쇨 상황이 아니다. 들으니 길증吉曾에게 반점이 돋았다고 한다. 이날 저녁에 만삭이 된 딸이 해산했는데, □…□다.



1799년-노상추 54세

1월 초1일(경신) 볕이 남.

이날 새벽에 영중英仲이 잠시 와서 이야기를 하였다. 이날 문여집文汝緝의 주인집에 머물렀는데, 주인의 어린 딸이 사망하였다. 집안에서 서로 떨어져 있어 죽과 미음을 서로 나눌 수가 없으니 병을 조리하는 것은 고사하고 더 상할까 매우 걱정이다. 들으니 비인庇仁 수령 이유철李儒喆이 사망하고, 그의 집 여자종이 일시에 3명이나 사망했다고 하니 너무나 참담하다. 밤에 눈이 뿌렸다.


1월 초7일(병인) 흐리고 추움.

이날 새벽 망곡례를 행하지 못하니 추모하는 정이 예전보다 갑절이나 심하다. 문여집文汝緝이 와서 이야기를 하였다. 섣달 보름 이후부터 대신과 경재卿宰로서 사망하여 입계된 사람의 수가 거의 20여 인이 넘었다. 그 사람들은 영부사 홍낙성洪樂性, 경기 관찰사 민종현閔鍾顯, 전임 판서 윤홍렬尹弘烈·정호인鄭好仁·김상집金尙集·신광리申光履·박종갑朴宗甲·이민보李敏輔, 전임 참판 류강柳焵·윤득부尹得孚·류의柳誼, 황해도 관찰사 이의준李義駿, 이창한李昌漢·송민재宋民載·이창회李昌會·이지영李之英·이주연李柱延이다. 그리고 황주黃州 목사 윤치성尹致性은 임지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부친 윤홍렬도 황주에서 사망하였다. 윤치성의 후임인 윤광석尹光碩도 부임한 지 이틀만에 황주에서 사망하였다. 류인철柳仁喆은 용천龍川 부임지에서 사망하고, 강원도 관찰사 홍인호洪仁浩도 임지에서 사망했으며, 전임 병마절도사 이우현李禹鉉도 사망했다고 한다. 그 이하 문관·음관·무관으로 입계되지 않은 사람이 많으나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전임 참판 심진현沈晉賢도 사망하였다.


1월 14일(계유) 볕이 나고 바람이 없음.

어떤 사람이 와서 한성의 5부에서 사망한 인원이 1만여 인이라고 하는데,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왕향지王向之가 찾아왔다. 박영재朴英載 석사碩士가 와서 남자종과 마필을 부탁했는데, 그가 생가 조부의 부음을 듣고 가는데 그곳이 여주驪州 땅이라고 하므로 허락하였다. 광양光陽 수령 황현기黃顯基 령令이 찾아왔고, 주부 정화경鄭和卿이 와서 이야기를 하였다. 군기시 첨정 조경신曺慶臣이 와서 조심해야 할 일을 물었다. 정재균鄭載均 석사가 와서 이야기를 하고, 선전관 이응회李應會가 와서 이야기를 하였다.


1월 18일(정축) 볕이 남.

이날 축시(오전 1~3시)에 채제공蔡濟恭 재상 대감이 사망하였다. 영중英仲이 조문하러 가서 들어가 곡하고 돌아왔다. 지금까지 세 명의 대신이 한꺼번에 사망하고, 11명의 판서도 한꺼번에 사망하였다. 그 이하 문관·음관·무관으로서 사망한 인원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으니, 나라의 운수와 관계된 것이다. 양일신梁日新이 아파서 돌아갈 수 없으니 염려스럽다. 장화심張華深 령令도 나의 병문안을 하지 않았고, 도사 장지원張趾元도 문안하지 않았으니, 대개 서울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도리로 바랄 수 없는 일이 많다. 이웃에 사는 비인庇仁 수령 이유철李儒喆이 사망한 지 10여 일이 지나도록 관으로 사용할 나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방에 시체를 그대로 놓아두고 상주가 직접 양주楊州에 가서 널판을 구하였다. 게다가 남자종 1명과 여자종 2명이 한꺼번에 죽었기에 관에 넣지 못하는 시신이 방에 가득하였다. 그의 삼촌 아저씨 이□□李□□가 비금琵琴 터 아래에 살고 있는데 살림살이가 매우 풍족한데도 돌아보지 않으니 이런 사람을 사람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이 사람이 일찍이 감역관의 후보에 들었던 것은 서울 선비로서 행동이 이와 같은 사람도 감역관의 후보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월 31일.


웬 악취미인가 싶지만 설 전날이니 역병의 시대에 맞은 설 특집을 한 번 써 보고 싶어서 일부러 새벽에 일어났다.

정조가 죽기 2년 전인 1798년 12월. 도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전국에 역병이 돌기 시작한다. 노상추는 천연두라고 생각했지만 돌고 있는 병이 비단 천연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미 천연두를 앓아 보았을 어른들도 픽픽 죽어나가는데 어찌 천연두만 돌았다고 볼 수 있겠는가.

돌고 있는 병이 무엇이었든 간에 이 때의 역병은 조정을 뒤흔들만큼 심각했다. 노상추를 비롯한 관료들도 병에 걸려 결근하며 몸조리를 하거나 혹은 영원히 결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일은 누가 하나. 남은 사람들이 나눠 하는 수 밖에.(역시 블랙기업 조선.)


노상추가 세들어 살고 있는 집에서도 환자가 나왔다. 주인집 딸이 병에 걸려 생사가 경각에 달해 있었기에 노상추는 섣달 그믐날 일기에 설을 쇨 상황이 아니라고 적었다. 과연 1799년 1월 1일. 설 떡국을 먹어보지도 못하고 주인집 딸이 사망한다. 노상추는 이미 병을 피해 다른 집으로 나와 있었지만 환자가 있는 집과는 서로 교류할 수 없어 죽과 미음을 전달해 주지도 못하였다.


섣달 보름까지 이미 대신과 경재(卿宰: 동반 2품 이상 관료) 중 전염병에 걸려 사망 보고된 사람이 20여 인이 넘었다고 한다. 동반 중 2품 이상이면 거의 외지에 나가 있는 관료들이다. 영부사, 경기관찰사, 황주 목사, 황해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등 사망자가 속출한 상황. 지방의 방위, 특히 북방을 담당하는 자리가 병으로 공석이 되었다는 것은 국방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황주 목사의 빈 자리를 채우러 새로 발령받은 사람도 부임하자마자 죽었다. 이 시기에 별다른 외침이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을 것이다. 보고된 것만 20여인이지 아직 보고되지 않은 사람은 더 많았다고 한다.


1월 14일에는 한성 5부에서 사망한 사람만 1만여 명이 넘었다는 소식이 노상추에게 전해진다. 노상추는 차마 이 숫자를 믿지 못한다. 오미크론으로 인한 확진자가 1만명이 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도 그랬다.

일성록을 보니 1월 29일에 올라온 사망자수 보고가 있다.


○ 수효는 다음과 같다.

중부(中部) - 533구(口)이다. -

동부(東部) - 523구이다. -

서부(西部) - 1666구이다. -

남부(南部) - 1023구이다. -

북부(北部) - 623구이다. -

이상 모두 4368구이다.


1월 18일. 채제공이 사망하였다. 노상추가 그 누구보다도 마음으로 믿고 따르던 인물이었다. 세가 쪼그라든 남인을 어떻게든 존속시킨 장본인이 아니겠는가. 채제공을 포함한 3명의 대신이 사망했고, 11명의 판서도 한꺼번에 사망했다. 문, 무관, 음관을 막론하고 사망한 사람은 이미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노상추는 이제 나라의 운수를 걱정한다. 민간의 상황은 더욱 참혹했다. 사망한지 열흘이 지나도록 장사를 지낼 관을 구할 수가 없어 시신을 한 방에 쌓아놓고 상주가 관을 구하러 동분서주(이러면서 병이 더욱 전파되었을 것)하는 경우도 있었다. 병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고 있었다.


노상추는 이번 역병의 유행으로 형수와 아내를 잃었다. 서울의 역병은 1월 말에 겨우 잦아들었지만 전국으로 퍼진 역병은 한동안 더 기승을 부려 3월까지 이어졌다. 역병의 여파일지 아닐지 알 수 없지만 정조도 1799년 3월 6일에 약방의 진료를 받고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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