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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 그까짓거 대강 해도

거벽의 무심한 실력발휘

by 소주인

무오일기 1798년(정조22)-노상추 53세


2월 27일(신유) 볕이 남.

진사 최광적崔光迪과 그의 조카인 진사 최봉우崔鳳羽를 방문하였다. 그의 조카 최학우崔鶴羽가 이번 사마시에 합격했기에 축하해주었다. 선산善山에서 사마시에 합격한 사람은 모두 5인으로, 이지수李之受, 최학우崔鶴羽, 김정찬金晶燦, 김숙金▼{土+肅}, 김창일金昌一이다. 김창일은 바로 하구미下龜尾의 양인이다. 그가 사수寫手에게 1백 금金을 받고 과문科文을 팔고서 과거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과문을 산 사람이 그가 백지 답안지를 내는 것을 꺼리므로 대충 써서 제출하고 물러나왔다. 그런데도 이처럼 합격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천운이라는 것이다. 연향延香으로 돌아오자 어머니 상중에 있는 족질 경□이 이미 어젯밤에 죽었다고 하니 마음이 아프다. 지난 24일에 지나는 길에서 악수하고 잠시 이야기 나눈 것이 그대로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수월산水月山의 □□ 묘에 성묘하였다. 산지기는 이득二得 놈을 쫓아내고 장불개張不介로 바꾸었다. 기엽箕燁과 종옥宗玉이 연향으로 가서 □…□ 위문하고 나는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올해는 장불개를 시켜 묘소의 남쪽 공터에 소나무를 심어야겠다.





2022년 2월 7일

과거 부정행위가 공공연하게 저질러지고 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라도 알고 있는 듯, 노상추는 과거 부정 자체에 대한 소감따위는 적지 않는다. 다만 1백 금의 돈을 받고 의뢰인과 함께 시험장에 들어간 거벽 김창일이 대강 쓴 답안지로 과거에 합격했다는게 흥미로운 일일 뿐이다. 1백 금 만큼의 정성을 들여 써 준 의뢰인의 답안지가 합격선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창일은 하구미의 양인이라고 썼으니 양반도 아닌 듯하다. 이름에 쓰인 한자도 얼마나 산뜻한가. 하지만 사마시에 합격했으니 이후로는 김초시라고 불렸을까? 이후 김창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혹시나 싶어서 방목도 찾아봤는데 동명이인만 발견될 뿐이다. 김창일의 합격은 거벽으로서의 명성에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눈에 띈다고 하여 일감이 끊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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