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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 보이콧

바람은 계산도 극복도 할 수가 없어

by 소주인

신유일기 1801년(순조1) -노상추 56세


3월 11일(정해) 볕이 남.

공주公州 영장營將이 밥을 먹은 뒤에 왔기에 토의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낮 무렵에 또 그 외조부의 무덤에 가서 성묘하고 바로 돌아왔다. 해미海美 수령도 왔다. 평택平澤 현감은 녹명관錄名官으로서 치진馳進한다는 사통私通이 왔는데, 잠시 뒤에 병장病狀이 와서 그대로 자신의 고을에 돌아간다고 하였다. 저녁에 해미 수령이 녹명관을 겸하여 과거 응시자의 단자單子를 받았다. 들으니, 예전부터 충청도의 과거 응시자들은 시비의 단서를 야기하고, 청장靑帳의 경우에는 과녁을 멋대로 앞쪽이나 뒤쪽으로 옮기면서 온갖 말썽을 부렸다고 한다. 또 어제 저녁에는 응시자들이 관아의 여자종을 쫓아다녀서 읍내에 폐를 끼쳤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문 밖에 방榜을 붙여서 옳지 못한 도리에 대해 이처럼 타일렀다. 군기감관軍器監官에게 분부하여 목전木箭에 사용하는 청장의 보수步數를 측량하고서 그곳에 흙을 쌓아 한계를 정한 뒤에 그 땅을 쉽게 평평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응시자들이 감히 멋대로 농간을 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서산瑞山 수령 조희유曺喜有가 문과 참시관參試官으로서 왔다.


3월 12일(무자) 볕이 나고, 오후에 서풍이 붊.

동이 트고 나서 장대將臺에 좌기座起하여 청장靑帳을 세우고 시험장을 열었다. 목전木箭 응시자로서 녹명錄名한 사람이 106인에 이르렀지만, 실제로 목전을 쏜 사람은 29인이었다. 한낮이 지나니 바람이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곧 회오리바람이었다. 그러므로 응시자들은 모두 민가로 피하고서 시사試射에 응시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여러 번 패牌를 보내도 명령을 듣지 않았으므로 저녁 무렵에 어쩔 수 없이 시험장을 마쳤다. 응시한 사람 29인 가운데 청장을 넘길 수 있었던 사람은 13인이었다.


3월 13일(기축) 흐리고 비가 한밤중부터 내리기 시작하여 종일 그치지 않으니, 처마 앞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음.

일찍 비가 잦아들어서 사대射臺에 나가 좌기座起했는데, 한량 무리가 하나도 와서 대령하지 않았으므로 저녁 무렵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마쳤다.


3월 14일(경인) 개고 볕이 남.

아침의 미풍이 늦게야 일었으며 이어서 서풍이 부니, 한량 무리가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와서 모였다. 동이 트고 나서 사대射臺에 나가 좌기座起하여 시험장을 열고 78인을 시사試射하였다. 한낮이 되어 목전木箭의 시험을 마쳤는데, 청장靑帳을 넘긴 사람은 36인 뿐이었다. 또다시 철전鐵箭의 시사를 열었는데, 응시한 사람이 47인이었다. 철전의 시사를 마치지 못하고, 저물녘에 자리를 마쳤다.


3월 15일(신묘) 볕이 남.

미명未明에 해미海美와 공주公州의 두 진장鎭將과 함께 객사의 전패殿牌 앞에 나아가 망곡례를 거행하고 또 망하례를 거행하였다. 이어서 동이 틀 때에 사대射臺에 나가 좌기座起하여 어제 마치지 못한 철전鐵箭을 시사試射하였다. 동이 트고 나서 편전片箭을 했으며, 또 조총鳥銃을 시방試放하였다. 철전은 스스로 시험을 보지 않은 사람이 2인이었고, 편전은 합격자가 하나도 없었으며, 조총에서 과녁을 명중시킨 사람은 4인 뿐이었다. 한낮 무렵에 시사를 마치자 서풍이 크게 일어나서 사람들이 눈을 뜰 수가 없어서 매우 걱정스러웠다. 이어서 점수를 계산하여 합격자 명단을 내었다. 1등은 1인이었는데, 한량 유백원兪百源으로 홍주洪州 사람이다. 2등은 3인이었는데, 통덕랑 유도원兪道源은 또한 홍주 사람이고, 부사용 안순安栒은 면천沔川 사람이며, 한량 유익원兪益源은 대흥大興 사람이다. 3등은 9인이었는데, 한량 조응화趙應和는 임천林川 사람, 한량 송득정宋得鼎는 회덕懷德 사람, 한량 홍경묵洪敬默은 면천 사람, 한량 김전옥金銓玉은 예산禮山 사람, 한량 조운제趙雲悌는 임천 사람, 한량 조운서趙雲瑞는 임천 사람, 통덕랑 성도순成道錞은 예산 사람, 통덕랑 남명원南命元은 해미 사람, 한량 민정석閔鼎錫은 부여扶餘 사람이다. 1등은 84푼[分] 12보步였고, 꼴등은 58푼 10보였다. 저물녘에 자리를 마치고 하처下處에 돌아왔다.



2022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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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린신부>로 일약 국민 여동생으로 떠오른 배우 문근영이 수능을 보던 해. 인기 때문에 문근영은 혼자 교실 하나를 통째로 쓰면서 시험을 쳤다.("문근영, 취재 경쟁 속 '홀로' 수능시험" KBS NEWS 2005. 11. 23) 당연히 특혜 논란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별 도리가 있었겠는가. 문근영이 만일 다른 응시자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시험을 봤다면 같은 시험장에 있어야 할 수험생들도 피해를 봤을 것이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욕을 먹게 되니 괴로웠을 터이다. 대관절 공정이란건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불리한 조건에서 중요한 시험을 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수능날 비행기도 안 뜨게 하는 나라. 하다못해 토익에서도 시험장 스피커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곤 한다. 시험과 공정 좋아하는 민족이니 조선의 과거 응시자들도 시험장 상태를 신경쓰지 않았을 리 없다.

홍주(현재의 홍성) 영장으로 부임한 노상추는 무과시험을 앞두고 응시자들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시험장을 정비한다. 일정 거리만큼 활을 쏘아야 합격인데 간혹 응시자들이 미리 시험장에 들어와 거리 기준점을 옮겨놓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시험을 망친건 바람이었다. 시험을 보는 도중에 서쪽에서부터 강한 회오리바람이 불어온 것이다. 활쏘기에 치명적인 핸디캡이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멋지게 활쏘기를 이어간 무과 응시자는 없었다. 응시자들은 이런 조건에서는 시험을 볼 수 없다며 이날의 시험을 단체로 거부하고 인근의 민가에 몸을 피해버렸다. 노상추가 사람을 보내 다시 시험장으로 돌아오라는 명을 내렸으나 노상추의 명을 듣는 응시자는 한 명도 없었다. 별 수 없이 이날은 파장이었다.

다음날은 비가 왔다. 시험관 노상추는 동 트기 전부터 시험장에 나가서 저녁까지 응시자들을 기다렸지만 응시자는 한 명도 오지 않았다. 활은 비에도 영향을 받을 테니까. 이날도 자연히 파장.

다시 날이 밝고 서쪽에서 바람이 좀 불긴 했지만 미풍 정도였다. 별 수 없이 응시자들이 과장에 모였다. 목전 응시자 106명 중 첫날 바람이 불기 전에 활을 쏜 사람은 29명이었는데 그 중 기준점을 넘긴 사람은 13명이었다. 이날 나머지 78명(왜 합친 명수가 녹명한 인원보다 많을까?)을 시험 봤는데, 그 중 기준점을 넘긴 사람은 36명 뿐이었다.

응시자의 절반 이상이 기준점도 넘기지 못하다니. 날씨에 민감하게 군 이유가 바로 부족한 실력 탓이었을까? 일기에서 노상추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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