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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자가 나란히 낙방한 과거시험

by 소주인

석사학위를 마치고 한창 취업을 하려고 애쓰던 시절에는 전근대 사람들이 부럽다는 몹쓸 생각을 하기도 했다. 태어날 때부터 미래가 정해져 있으니 진로 고민도 필요 없고 취업 걱정도 없을거라고. 하지만 양반이라고 영원히 양반은 아니니까 나름의 고민은 있었을 것이다. 한 2대 정도 과거 급제자가 안 나오고 자기 대가 되면 꽤나 마음을 졸여야 하지 않았을까. 이대로 유학 신분에서 떨어져나와 군역을 지느냐 마느냐가 자기 대에 결정될 수도 있으니까. 집안에 땅이나 돈이 많으면 조금은 걱정이 덜 되었을 수도 있겠다.


현대의 공무원 시험을 가볍게 취급하려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현대 사회에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 전근대의 과거와 현대의 공무원 시험을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 하기는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 별시니 뭐니 해서 과거 시험도 정기/부정기적으로 열렸고, 또 소과만 급제해도 양반으로 행세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으니 과거가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자를 깨치는 것만 해도(한문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고 정해진 방식의 답안지를 작성하는 것은 기술과 지식이 모두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옛날 이야기에 쉽게들 나오는 김 초시, 이 생원, 최 진사를 가볍게 볼 수 없다.


소과 급제자인 생원, 진사들은 양반 지위를 유지하는 데 만족하고 그대로 지내기도 했지만 꾸준히 대과에 도전하기도 했다. 생원, 진사도 관직을 얻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웠듯 이들이 음직으로 얻을 수 있었던 관직은 9품 정도에 불과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금난수도 첫 관직으로 9품 참봉직을 지낸다. 벼슬 욕심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참봉자리에 갔던 금난수의 심경에도 반 년이 지나자 변화가 있었던 듯 싶다.


금난수는 부임한 지 6개월째 되던 1580년 1월, 임지인 제릉에서 도성으로 들어와 남부동(南部洞: 지금의 서울 중부경찰서 근처)에 임시로 거처를 정하였다. 2월 말에 도성에서 별시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이번 별시에는 금난수의 아들들 중 막내만 빼고 모두 응시할 예정이었다.


특유의 느긋한 성격 덕인지 금난수는 시험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크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1월부터 2월 초까지 도성에 있는 여러 지인들과 만나 연일 술자리를 벌였다. 그 동안 고향에 있던 아들들도 속속 도성으로 들어왔다. 2월 11일에는 큰아들 금경과 둘째아들 금업이 육로를 통해서, 평소 형제들과 행동을 따로 하는 경향이 있는 셋째아들 금개는 여주에서부터 김택룡과 함께 뱃길을 통해 서울에 들어왔다. 비록 길은 달리 왔으나 도착한 날은 같았다. 아들들이 도성에 들어와 있었지만 지인들과의 만남은 시험 이틀 전까지 매일 이어졌다.


2월 25일에는 성균관 명륜당에서 알성시(謁聖別試)가 치러졌다. 알성시는 왕이 문묘에 제례를 올릴 때 성균관 유생들과 그에 준하는 자격을 갖춘 자들이 응시하는 비정기 문‧무과 시험이었다. 문과의 경우에는 식년시와는 달리 초시나 복시를 보지 않고 왕이 친히 참가하는 전시(展試)만으로 당일에 급제자를 선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5월 25일과 5월 29일, 3월 2일 세 번에 걸쳐 시험이 거행되었다.


2월 29일에 금난수는 제3소인 장악원에서 시험을 보았고, 금난수의 아들들은 성균관으로 들어가 시험을 쳤다. 3월 2일에는 시험의 마지막 절차인 종장(終場)이 치러졌다. 이 때 시험문제로는 송정이등진수정학제(宋程頤等進修正學制)에 대한 표문이 출시되었다.


이번 시험에 금난수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연일 벌인 술자리 때문이었을까? 이번 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은 총 12명이었다. 급제자 중에는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이 있었다. 이 때는 아니지만 3월 18일에 열린 별시에서는 이덕형이 2등으로 급제하였다. 비록 금난수와 아들들은 급제하지 못하였지만 쟁쟁한 사람들이 이 해에 조정으로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1580년(선조 13)-금난수 51세


2월 11일

경憬과 업(�) 두 아이는 여주呂州에서 부터 개愷와 헤어져 육로로 오고, 아이 개愷는 김시보金施普와 함께 뱃길로 왔는데, 한꺼번에 도성에 들어왔다.


2월 25일

알성별시謁聖別試 시험장에 들어갔다.


2월 28일

저녁에 아이 경憬 등이 김시보가 묵는 집에 가서 잤다. 내일 시험장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2월 29일

제 3소인 장악원掌樂院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성균관에 들어갔다.


3월 2일

종장終場 시험장에 들어갔다.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8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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