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화 사랑하는 사람과 그려본 미래
AI 이미지 Gemini
준우와의 연애는 채원에게 '시간'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예전의 말자에게 늙음이란 비참한 퇴장이었지만, 지금 채원에게 늙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발을 맞춰 걷는 소중한 과정이었다.
"채원 씨, 우리 나중에 나이 들어서 주름이 자글자글해져도 지금처럼 손잡고 산책해요. 내가 그때도 채원 씨 가방 들어줄게요."
한강 변을 걷던 준우가 채원의 손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채원은 그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어차피 자신도 다시 늙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처럼 홀로 외롭게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다정한 남자 곁에서 자연스럽게 인생의 가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이번에 늙으면 정말로 끝이지만, 준우와 함께라면 그 끝이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채원의 행복이 짙어질수록, 과거의 그림자는 더 길게 드리워졌다.
"엄마, 오빠가 미쳤나 봐. 납골당에 매일 가서 살더니, 이제는 엄마 유골함을 집으로 가져오겠대."
지윤의 다급한 전화 한 통에 채원의 평화는 산산조각 났다. 강수는 엄마의 유골함 앞에 자신이 사준 내복이라도 넣어드려야 한풀이가 되겠다며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만약 강수가 유골함을 집으로 들고 가 열어보기라도 한다면, 그 안이 가짜라는 사실은 금방 탄로나고 말 것이다.
"안 돼... 강수가 그걸 알면 너나 나나 다 끝이야."
채원은 준우와의 저녁 약속도 잊은 채 급히 납골당으로 향했다. 멀리서 보이는 납골당 입구, 강수는 7년 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으로 엄마의 유골함을 가슴에 꼭 껴안고 나오고 있었다.
"엄마...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이제 집에 가자, 엄마."
아들의 절규 섞인 혼잣말이 바람을 타고 채원의 귀에 박혔다. 채원은 근처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아들을 향한 미안함에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지금 나서면 지윤의 희생도, 자신의 이름 '이채원'도, 그리고 준우와 꿈꾸는 미래도 모두 물거품이 된다.
채원은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그때였다.
"채원 씨...? 여기서 뭐 해요? 저 남자는 누구길래 그렇게 울고 있어요?"
언제 따라왔는지 준우가 뒤에서 채원의 어깨를 잡았다. 채원의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렸다. 한쪽에는 유골함을 안고 울고 있는 아들 강수가, 다른 한쪽에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인 준우가 서 있었다.
지윤의 경고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그 말은, 어쩌면 다시는 예전의 가족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형벌 같은 선언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