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감자》

김동인의《감자》

by 우물 안 개구리



누구에게나 그리운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고, 그를 다시 불러일으키게 하는 매개체가 있을 것이다. 그건 스쳐 가는 길거리 속 귀에 꽂히는 노래가 될 수도 있고 어떤 냄새나 햇볕, 계절의 온도, 바람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내게는 김동인의 단편선이 그러한 존재다. 문학소녀 시절 엄마가 읽었다는 소개와 함께 책과 나는 처음 만났다. 안 그래도 감수성 짙은 시기, 읽으면서 형용할 수 없던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머릿속에 연신 물음표와 느낌표를 남겼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건 ⟪감자⟫였다.


돈 몇 푼에 늙은 영감에게 팔려간 주인공 복녀는 계속해서 기울어 가는 가세에 빈민촌으로 쫓겨나 송충이 잡이에 동원된다. 대단한 양반가 출신은 아니더라도 나름 정직한 농가 출신인 그녀는 성실하게 송충이만 잡는다. 그러다 감독의 눈에 들어, 놀면서 돈 버는 법을 깨친 복녀는 마음 한 구석 남아있던 도덕성보다 "한 댓 냥"을 택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녀의 타락은 마치 복리 이자처럼 불어나기 시작한다. 돈 좀 깨나 만진 거지에게 빌린 돈, 중국인 왕서방네 밭 서리 모두 몸과 바꾼 결과물이다. 나중엔 아예 남편의 묵인 하에 왕서방에게만 몸을 팔고 부부는 그 돈으로 생계를 이어나간다. 자연스레 복녀는 왕서방을 제 애인처럼 여기고, 그가 돈 주고 사온 새색시와의 첫날밤엔 질투에 눈이 멀어 낫을 들고 덤빈다. 그러다 목숨을 읽게 되는 건 외려 그녀였다. 다음날 남편과 왕서방 사이에 이루어진 몇 번의 협상, 한방의에게 건네어진 돈으로 복녀는 죽은 지 며칠이 지나서야 뇌일혈이라는 사망 진단을 받고 묘지에 묻힌다.


이처럼 ⟪감자⟫는 별다를 것 없는, 오히려 흔하디 흔한 전개를 담고 있다. 배고프고 어려웠던 시절을 그려낸 한국 근현대 문학이 가진 클리셰란 클리셰는 몽땅 들어가 있다. 배곯는 가족, 재취(再娶)로 팔려가는 뽀얗게 어린 소녀,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억척스럽고 강인한 여성으로 변화하는 과정. 그럼에도 특별하다 말할 수 있는 건, 아마 작가 김동인의 대비되는 글쓰기 방식 덕분일 것이다. 그의 필체는 나긋나긋하다. 어떤 때는 그러다 못해 속살거리는 느낌까지 난다. 타락한 자본주의 속에서 도덕성과 돈을 맞바꾸든 낫에 휘둘려 죽든 상관없이 힘을 빼고 잔잔하게, 마치 미끄러져 가듯 묘사하고 대화한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굉장히 묵직하고 제대로 된 한 방을 선사한다. 특히 결말에 있어서 만큼은 거침이 없다. 이러한 대비적인 양상이 우리로 하여금 충격받게 하고, 그 정도도 더 크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아내를 잃고 동생을 찾아 나서는 뱃사람의 이야기인 ⟪배따라기⟫를 비롯해, 번뜩이는 영감(靈感)을 위해 잔인한 일을 벌이는 미치광이 작곡가를 그린 ⟪광염 소나타⟫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평소 반전 매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잔잔하게 미친 작품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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