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ㆍ아버지의 꽃
초등시절에 저학년 때까지 살았던 고향집에는 작은 화단이 두 곳 있었다.
한 곳은 앞마당 대문칸 옆 가장자리의 작은 꽃밭으로 주로 누이들이 가꾸었다. 감꽃이 떨어지는 5월 말쯤에 이르면 어느새 온갖 꽃모종들로 빈자리 없이 꽉 채워졌다.
그때쯤이면 화단 앞쪽에는 봉숭아, 채송아, 분꽃, 맨드라미, 서광(메리골드), 다알리아, 족두리꽃(풍접초)등이 먼저 자리를 잡았고 화단 뒤쪽에는 키 큰 해바라기, 접시꽃 ,삼엽 국화 등 종류도 참 다양했다.
이 꽃들 대부분은 누이들이 꽃씨를 받아 두었다가 직접 씨를 뿌리거나 이웃집에서 모종을 분양받아 키운 것들이었다.
또 하나의 화단은 안채 뒤뜰 장독대 옆에 넓게 차지한 함박꽃 밭이었다. 5. 6월 고고한 자태의 순백색 꽃망울이 커다랗게 피어날 때면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은은한 카모마일 톤 꽃향기가 뒤뜰을 가득 채웠다.
이곳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조성한 꽃밭으로 각별하게 여겨졌으며 매년 봄마다 순백의 향연을 펼치곤 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누이들이 가꾸는 앞마당의 아기자기하고 꽃 종류가 훨씬 다양하고 피보나츠 수열이 선명한 다알리아 꽃이 돋보이는 작은 꽃밭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오르지 뒤뜰 장독대 옆 함박꽃 밭에만 관심을 두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의문이 풀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함박꽃의 뿌리는 중요한 한약재였다.
서너 해에 한 번씩 뿌리를 캐내어 잘 씻고 말려서 읍내 한약방에 내다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그 시절에 귀하던 나무 꽃인
백일홍을 오래전 울안에 심어 놓으셨다. 누이들은 그 나무를 간지럼나무라고 불렀는데 여름부터 가을까지 백여 일 동안 진홍색 꽃송이가 연달아 피어나 온 집안이 장관을 이루었다.
울타리밖 돌축대 틈사이로 대국 국화의 커다란 꽃군락도 있었다. 매년 가을에 노란색 보라색 꽃이 무더기로 활짝 피어날 때면 지나가는 동네 이웃들까지 눈과 코를 즐겁게 하였다.
그 후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우리 집 함박꽃이 작약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집 함박꽃은 더 좋은 한약재로 쳐주는 백작약이었다.
이제는 비슷한 꽃인 목본의 모란 또는 목단과 구분할 수도 있다.
물론 함박꽃이란 명칭은 시골 어른들이
큰 꽃송이를 보았을 때 붙인 별칭으로 생각되며
나무꽃인 함박꽃나무가 별도로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작약은 매년 봄에 탐스러운 붉은빛 새순을 사슴뿔같이 힘차게 돋아내는 여러해살이 한약재 풀꽃이다.
그 후 유월경 충북지역을 여행할 때면 드넓게 펼쳐지는 약재용 작약꽃밭을 관심 있게 보곤 했다.
나는 아직도 흰 작약꽃을 볼 때마다 추억 속에 피어있는 아버지의 함박꽃밭이 항상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