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취향

아이의 친구, 나의 관계

by 똥강아지

아이를 통해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통해 나를 다시 본다.

독일에 와서 가장 흥미로운 건—그리고 가끔은 가장 피곤한 건—이 ‘관계의 교차점’이다.

같은 시기에 입독한 남편 동료 가족들, 같은 학년 친구의 부모들,

비슷한 또래의 엄마들.

우리의 인연은 대부분 아이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그 인연이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는다.


아이끼리는 너무 잘 맞는데,

나는 그 엄마와 대화가 자꾸 마무리되지 않을 때가 있다.

반대로, 나와는 유쾌하게 맞는데

아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문득 멈춘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편한 사람’은 다르구나.

아이도, 나도, 각자의 관계 취향이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나는 사람 사이의 계산에 익숙했다.

도움을 주면 반드시 돌려줘야 하고,

호의를 베풀면 그만큼의 예의를 되갚아야 했다.

잘못 풀린 관계의 수식은 삽시간에 오답노트로 돌아왔다.

그 긴장감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마음을 닫는 법도 함께 배웠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가벼운 인사에도 거리의 두께를 재고,

초대받으면 먼저 이유를 떠올리고,

선물에는 금액보다 의도를 읽으려 든다.

이건 서글프지만 일에서 온 피로의 습관이자, 나를 위한 방어의 기술이다. 나도 내 아이도 되도록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아이는 다르다. 놀라울만큼 본능적이다.

좋아하는 친구가 생기면 그날로 초대하고,

싸워도 다음 날 바로 웃는다.

서로의 말이 통하지 않아도

같은 장난에 웃고, 같은 게임에 몰입한다.

의도보다 웃음이 먼저이고,

계산보다 마음이 앞선다.

그 순수함이 부럽기도 하고,

가끔은 묘하게 불편하다.

나의 닫힌 마음이 아이의 열린 세계 앞에서

잠시 어색해지는 순간들.

그게 요즘의 긴장감이다.


나는 여전히 관계 앞에서 조심스럽다.

좋아해도 티를 많이 내지 않고,

가까워도 여지를 남겨둔다.

이건 나의 생존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를 보며 가끔 생각한다.

나도 저렇게 웃을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 없던 시절.

그때의 마음을 조금만 빌려오면,

이 낯선 땅의 관계도

조금은 부드러워질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사람을 만나도

“이 관계가 얼마나 갈까”보다

“이 사람이 내 하루를 따뜻하게 해주었나”를 먼저 묻는다.

짧아도 괜찮고, 깊지 않아도 괜찮다.

그날의 대화가 나를 조금 웃게 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관계에도 온도와 거리, 그리고 취향이 있다면

나는 이제서야

내 취향의 온도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이의 순수함 덕분에 나는

다시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연습을 한다.

서툴고 느리지만,

이것 역시 살아가는 방식의 하나일 것이다.

아이의 사회성은 오늘을 향하고,

나의 관계는 내일을 걷는다.

두 속도가 다르지만,

어쩐지 그 어긋남이

지금은 꽤 아름답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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