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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May 23. 2022

만년필

10년 전의 나, 지금의 나


문구에 대한 묘한 애정이 있다. 그러다 문득 만년필에 꽂혔다. 내가 좋아하는 블로거는 푸른색 잉크의 펜으로 풍경을 멋들어지게 그렸다. 동경과 덕질에 불타오르는 우매한 남자에게 웃으며 만년필을 선물했다. 신이 나서 한동안은 만년필에 어울리는 노트, 다이어리 등으로 분주했다.




10년이 지나, 여자친구는 아내가 되었다. 애지중지하던 만년필은 두어번의 실종을 겪었지만, 그래도 To Do List 작성에는 활용되는 정도로 인연을 이어갔다. 그렇다. 이 만년필도 이제 10년이나 되었다.




며칠을 멀리하면 만년필을 토라져 꾸덕해진다. 그럴 땐 뜨거운 물을 잔에 담고 온천욕을 시켜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삐걱거리던 펜의 유선이 다시금 매끄러워진다. 서걱거리는 종이와 펜촉의 마찰음을 듣노라면, 명언 한 줄도 적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오래된 만년필은 나만큼 까탈스럽다. 뚜껑을 오래 열어두어도 안되고, 며칠을 쉬게 해서도 안된다. 이 투정 가득한 물건을 오랫동안 쳐다본다. 애석하게도 만년필은 애닳아하지 않는다. 재촉하지도 않는다. 뚜껑을 빙글 돌려 열면, 흡사 저린 무릎을 손목으로 디디며 일어서는 노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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