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리는 증오에 익숙해져간다

우리 모두가 가진 자석에 관하여

by 민호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은 각기 마음속에 자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처음 세상에 나오자 보이는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는 나를 당기는 자석을 가지고 있으셨다. 성질이 달라서였을까. 여러 번 다투더라도 언제나 자석은 서로를 다시금 끌어당겼다. 살면서 힘이 들 때, 비록 몸은 멀리 있을지라도 누군가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힘, 자석은 내게 그런 힘을 가진 존재였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자석이 '그런 힘'을 가진 존재라는 내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지하고 싶었다. 이기적인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쉽게 밀어내는지를 절실히 느껴서였을까... 나는 자석의 또 다른 힘, 미는 힘을 애써 외면하려 하고 마치 아기처럼, 태어난 그 순간에서처럼, 나를 당기는 힘을 찾고 그 힘에 의지하려고 했다.


그 힘에 영원히 의지하려고 한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었을까? 어느 날, 자석의 그 든든한 인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다른 하나의 자석이 멀어졌을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검은 옷에, 검은 장우산을 들고, 다른 검은 사람들과 검은 눈물을 흘렸다. 그때부터 하나둘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인력이 사라져 가자 내게 남은 것은 척력뿐이었고, 그렇게 나는 하염없이 세상으로부터 밀려나갔다.


세상은 결코 따뜻하지 않다. 따뜻한 세상은 인스타 같은 곳에나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나에게서 소중한 것을 앗아가도 무서우리만큼 조용한 것이 현실이며 이기적인 서로가 서로를 끝없이 밀어내는 것이 세상이다. 그나마 의지할만한, 진실한 하나의 따뜻함마저 영원하지 못한 세상은 단순히 버티기 위한 공간일 뿐이다.


버티는 삶, 누군가 정의한 삶의 이러한 모습은 얼마나 나와 우리들의 삶을 정확하게 정의하였는가! 자석 그 자체는 밀거나 당기는 어느 하나의 성질을 택하고 있지 않지만 경쟁체제의 미명 아래 수많은 자석들이 남을 밀어내는 방향으로 돌려져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상황에서 버틴다는 것은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버틴다는 표현, 나는 그 적절성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버틴다는 것은 매우 처절한 표현이다. 버티는 삶이 지금의 우리 삶을 묘사하기에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왜 우리 삶이 당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밀어내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정녕 당기면서 시작해 당기면서 끝날 수는 없는 것일까?


때로는 밀어냄도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서로를 당길 수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다. 필요하면 네트워킹이라는 이름 아래 당기는 척은 하지만 다가가서 보면 누구의 자석이든 견고하게 미는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다. 태어난 그 순간 이래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어떤 자석이 다가오더라도 더 견고하게, 물러섬 없이 밀어내는 것이다. 나조차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이 세상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더 내어줄 수는 없다. 심지어는 그 누군가만 없으면 조금이나마 덜 버텨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보다는 증오에 더 익숙한 동물이 되어가고 천성이 착해 증오할 수 없다면 아예 누구와도 얽히지 않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당김이 간절하다. 특히나 진정성 있는 당김이 절실하다. 거짓 당김에 속은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다시 버팀의 방으로 들어갈 뿐이다. 세월이 지나 그 사람들이 주류가 되고 권력을 갖게 되면 다시 수많은 사람들을 버팀의 방으로 밀어낸다. 그렇게 버팀은 최고의 생존전략이 되고 버틸 줄 모르는 순진한 자석들은 철저하게 도태된다. 그러나 처음에 누군가가 진정성 있게 당기는 것을 시작으로 '진정성 있는 당김'이 주류가 되었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잃게 되었을까?


오늘 다시 태어난 그 순간의 그리운 자석들을 되뇌며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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