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플래너를 만들고 싶은 거야?

평생 살고 싶은 오늘

by Taylogue

작년 10월에 사업자를 냈는데, 내자마자 정말 많은 사람으로부터 '대체 무슨 사업을 하려는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때가 되면 알려주겠다며 적당히 뭉개고 넘어가기를 수십 차례, 어제 대학시절 룸메이트와 오래간만에 이야기를 하다가 또 같은 질문을 받았다.


"어떤 사업 생각하고 있어? 너무 기대된다."


나도 내가 습관처럼 뭉개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왠지 달랐다.


"아, 나 플래너 만들고 있어."

"어떤 플래너인데? 목표 세우고 이뤄가는 그런 거?"


여기서 조금 머뭇거렸다.

어떤 아이템이든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데, 정말 오랫동안 머릿속으로 키워왔던 방대한 양의 생각들을 한 줄로 정리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단순하게 계획 세우고 지키고 그런 건 이미 많잖아.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진단하고 필요한 경험들을 채워서 매일 살고 싶은 하루를 만들고, 그런 하루를 반복해서 살게 해주는 나침반 같은 컨셉으로 디벨롭하고 있어."

"오, 나한테 필요한 플래너다. 완전 기대돼!"


대단한 군사기밀도 아닌데 수십 번의 질문에 입을 다물었던 까닭은 사실 별 게 없다.


내가 플래너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건 순전히

'내가 쓰고 싶은 플래너가 없어서'였고 > 기왕 만드는 거 주위 사람과 함께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 (비슷한 시점에) 평생 일을 해야 한다면 내가 심적으로 크게 힘을 들이지 않아도 평생 할 수 있을 일(이미 하고 있고, 이걸로 밥이나 빵이 나오지 않아도 어차피 평생 할 생각인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 그게 마침 '좋은 플래너를 만들어서 평생 쓰는 것'이었을 뿐.


나와 같은 마음으로 플래너를 써주는 사람들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모였을 때 서로 잘 살기 위한 인사이트를 공유하고 교류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면 재미있겠다 정도의

생각은 있지만, 이걸로 큰돈을 벌겠다거나 본격적으로 '사업화'를 해보겠다는 거창한 생각은 없다.


지금의 목표는,

내가 100% 만족할 수 있는 플래너 만들기

주위에 필요로 할 만한 사람들에게 선물하기


정도이고, 그 과정에서 내 지인이 아닌 일반인의 수요가 꽤 된다 싶으면 일이 커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는 게 내 '사업계획'이라는 것의 전부이다.


그러니 사업아이템이니 사업계획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곤란한 웃음으로 모면할 수밖에.





나는 스타트업만 네다섯 군데를 거쳤다.

회사 규모가 작다 보니 자연히 일반적인 직장인들에 비해 사업가(대표)를 가까이에서 볼 일이 많았다.


저 멀리에 있는 회사 대표님, 이 아니라 내 옆에서 나랑 같이 일하고 말하고 밥먹고 술을 마시는 사업가의 민낯을 보는 일.

내 머릿속에서 이미 시체가 되었거나 곧 시체가 될(죄송해요...) 스승들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일.

그리고 이 기나길(가능성이 높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고민하는 일.


이 세 가지 일들이 지난 몇 년간 내 삶을 채우며 투닥투닥 자리다툼을 했다.



한 문장을 소화하기도 전에 변화하고, 변화하고, 또 변화하는 혼란한 시대를 살다 보면, 타당하고 그럴듯한 수많은 가치들이 수많은 '더 그럴듯한' 명분에 의해 속절없이 변질되고, 사장되고, 갈음되는 장면을 끊임없이 목격하게 된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는 우리가 낭만적이라 치부하는 가치들과 대척점에 서있는 경우가 많고,

양쪽을 힘의 저울에 올려두었을 때, 우리는 아주 높은 확률로 자본주의의 논리가 승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완벽주의자의 욕심, 내지는 결벽증이라 해도 할 말이 없지만, 나는

어떤 계절에도 지지 않고, 어떤 시절에도 꺾이지 않을, 나와 모두가 원할 만한 영원한 가치를 찾고 싶었다.

그런 가치를 내 삶의 정중앙에 두고 남은 생을 고민 없이 살아가고 싶었다.


먼 미래의 영광을 위해 최대한 빽빽한 계획을 세우고 현재를 갈아 넣는 삶이 아니라

당장 내 오늘 하루에 기쁨과 충만함을 느끼며 남은 인생도 딱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드는 일상을 원한다.

그런 오늘이 매일 반복되어 내 평생을 채우기를 바란다.


나는 평생 기 모았다가 마지막 하루만 행복한 삶은 싫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평생 행복하고 싶다.

그리고 모두가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럼 이 징글징글한 혐오와 이기주의도 지금보다는 사그라들겠지... 사람이 배가 부르면 너그러워지기 마련이니까...)


그냥 그런 나의 (원대한) 바람을 현실로 끌어와 줄 플래너를 만들고 싶은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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