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의 세계에 왼발등 중간 정도나 겨우 걸친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주제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가드 올리고 한 마디 한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지만,
나쁜 루틴은 있다.
진짜다.
애초에 루틴이라는 건 무엇인가.
내가 자주 하는 행동/일 사이에서 일정한 규칙성이 발견될 때 우리는 그것을 루틴이라고 부른다.
시간까지 고정되어 있으면 금상첨화다.
(내용이 썩 생산적이지 않거나 너무 단순하다 싶으면 버릇 내지는 습관이라고 하기도 하는 것 같다)
루틴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내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애초에 아침에 눈을 뜨긴 하는지부터) 밤에 잠이 드는 순간까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내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나니, 내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와 더불어 가까운 미래에 어떤 삶을 살게 될지가 아주 투명하게 보였다.
아, 이렇게 살다간 나락행이겠구나.
나는 그렇게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내 하루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고민하고, 나에게 적합한 루틴을 설계해 적용하는 일을 반복해왔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알게 되었다.
마치 카오스 같다고(하지만 이제 질서는 없는) 느꼈던 나의 하루에도,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루틴'이 있다는 것을.
사실 나를 나락으로 이끄는 숙적은 의외로 인스타나 유튜브가 아닌 (그 둘도 치명적이긴 했지만) '잠'인 경우가 많았다.
밖에 나가서 질문을 받을 때는 언급하지 않지만 사실 나의 1등 취미는 '잠자기'이다. 나는 졸리면 잠을 (많이) 자고, 피곤하면 잠을 (많이) 잔 다음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낮잠(이지만 밤잠만큼 긴)을 잤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아무렇지 않게 잠을 잔다. 그냥 계속 잔다는 말이다.
잠자는 게 너무 좋아서 일부러 중간에 알람을 맞춰 일어난 후 '아, 아직도 더 잘 수 있어'라며 황홀해한 뒤 다시 잠에 들기도 한다. 변태냐는 말을 자주 듣는데 뭐 아무튼 그만큼 나는 잠자는 것을 좋아하고, 잘한다(?).
하지만 나의 하루를 연속해서 관찰하다 보니 내가 잠에 드는 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이나 영상물을 다량 섭취한다 → 눈이 피로해진다 → 잔다
밥을 먹고 바로 책상에 앉는다 → 식곤증이 온다 → 잔다
눈치게임에 실패해 얇은 옷을 입고 나갔다가 달달 떨며 귀가한다 → 극세사 5종 세트로 체온을 올린다 → 몸이 녹으며 졸려진다 → 잔다
맥주나 와인을 딱 한 잔 정도만 마신다 → 나른해진다 → 잔다
운동을 다녀와 샤워를 한다 → 피곤이 몰려오며 나른해진다 → 잔다
그리고 나는 위의 패턴들을 시도 때도 없이 반복하며 잠에 든 후, 일어나서는 '앗, 이렇게 많이 자버리다니. 내 시간...... 내 자기 계발......' 하며 깊은 자괴감에 빠진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다시 같은 패턴들을 반복하며 잠에 내 소중한 시간을 탈탈 털어 넣는다.
그렇다. 놀랍게도 나는 루틴이 있는 인간이었던 거다.
사부작사부작 뭔가를 하려고 하다가 계획했던 생산적인 일들은 하나도 하지 못한 채 잠이 든 후 그런 스스로를 원망하며 다시 그 쳇바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루틴.
이쯤 되면 눈치채는 사람이 있을 것도 같은데,
그렇다.
나쁜 루틴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관성'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나는 곧바로 내 나쁜 루틴, 혹은 관성의 '맥'을 끊기로 결심했다.
글이나 영상물을 소량만 섭취한다 → 눈이 피로해지지 않는다 → 하려던 일을 한다
밥을 먹고 바로 책상에 앉지 않는다 → 식곤증이 오지 않는다 → 하려던 일을 한다
눈치게임에 실패할 일 없게 일기예보를 꼼꼼히 확인하고 날씨에 맞는 옷을 입는다 → 체온을 올릴 일이 생기지 않는다 → 하려던 일을 한다
맥주나 와인을 마시지 않는다 → 나른해지지 않는다 → 하려던 일을 한다
운동을 다녀왔으면 할 일을 먼저 끝내고 샤워를 나중에 한다 > 마음 편히 쉰다
오랫동안 유지해온 관성을 통째로 뜯어고치는 것은 기득권자의 기득권을 빼앗는 일만큼이나 쉽지 않을 테니
이 모든 흐름이 시작되는, 시작점에만 변화를 주었다. 관성이 작동하기 전에 관성 유발자(?)의 행동 방향 자체를 틀어버리자는 전략이었다.
시작점만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연쇄적으로 일어나던 2차, 3차 반응들이 없어지거나 반대로 바뀌었다. 자연히 무엇으로 시작하든 잠으로 귀결되던 패턴이 완전히 바뀌었고 중요한 일들을 미뤄두고 맥없이 늘어져 잠이나 자는 날들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나는 같은 방법을 다른 '나쁜 루틴'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유도 모른 채 반복되던, 나의 하루를 불쾌하게 만드는 루틴들을 하나둘씩 쫓아내고 빈자리에는 새로 알게 된 '좋은 루틴'을 초대했다. 그렇게 나의 하루가 나에게 자괴감이나 불쾌감 대신 '긍정적인 감각/경험'을 주는 일들로 채워져갔다.
사람 간의 대화에서 맥 커터란 눈치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사회의 악 취급을 받는데, 이 관성이라는 녀석에게 있어서만큼은 맥 커터만 한 치료약이 없었다.
내가 계속 변해가는 만큼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들이 늘어간다.
나의 하루에 찾아드는 사건들이 달라지고, 내 마음도 달라져,
이전에는 좋았던 것들이 싫어지기도, 반대로 이전에는 부정적이었던 경험이 갑자기 긍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매 순간 변해가는 나에게 맞춰 더 즐겁고 충만한 하루하루를 기획하고 실현해나가는 경험은, 낯선 경험 덕후인 나로서도 전례를 찾기 힘들 만큼 새롭고 특별하다.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좋아하는 것들을 다시 오려 붙여 만든 내 하루가 좋다.
어제도 좋았고, 오늘도 좋았으니, 나는 이 하루를 내일도 살 거다. 그렇게 매일매일 평생 좋은 하루를 살아낼 거다.
세상에는 나쁜 루틴도 있다.
오랜 관성들이, 잘 살아 보겠다고 버둥거리는 나를 자꾸만 늪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맥 커터와 함께라면, 나는 언제든 내 발목을 옭아매고 있는 것들을 끊어내고 더 나은 하루를 향해 떠날 수 있다.
그렇게 더 좋은 하루를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