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시장이 지금처럼 세상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나는 컨텐츠 광팬이었다.
컨텐츠 중에서도 유독 폭발적으로 소비하던 것은 물론 글과 말이었는데,
'잘 쓴 글'이나 '유려한 말' 자체에는 생각보다 큰 감흥이 일지 않았던 비해 (참고로 나 유미주의자임)
말과 글 안에 담긴 철학, 혹은 그 말과 글을 빚어낸 이의 삶의 방식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이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어떻게 이렇게 살지?'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지?'
이 세 질문이야말로 내게는 부정할 수 없는 '입덕의 신호'이다.
삐빅,
입덕하셨습니다.
그렇게 글과 말을 매개로 알게된, 내 물리적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존경하고 스승으로 모시는 일이 내게는 거의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었다.
다행히 3D 캐릭터에 빠지는 것은 내 취향(인지 성격인지)상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실제로 살아 숨쉬는 인간이었다.
내 스승들은 평범한 블로거였고, 학생이기도 했으며, 작가이고, 음악가이고, 사업가였다가, 최근 몇년 간은 그 모든 것이면서 유튜버인 경우가 많았다.
마음의 스승을 모시고 나면 (물론 본인의 동의는 구하지 않는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가 가진 지식과 지혜와 삶과 말, 글을 천착한다.
파고, 또 파면서 흡수하고, 다시 또 판다. 그리고 다시 흡수한다.
그렇게 일정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더이상 새롭지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내가 그것들에 익숙해져서 오는 매너리즘이라거나, 그가 도태되기 시작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흡수한 것들이 내 마음과 삶에 단단히 자리잡아 이제는 완전히 내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의미이다.
그때가 되어야 나는 그를 놓아준다.
이 시점에 내 안에서 그의 이미지는 흡혈귀에게 피를 몽땅 빨리거나 디멘터에게 영혼을 털린 인간의 껍데기 같은 것에 가깝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스승님, 죄송해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제가 너무 많이 마셨네요......
그렇게 내 안에 스승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가면, 나는 몹시 가파른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는 이의 마음이 된다.
다음 계단이 너무 가파르다 싶으면 한번씩 뒤를 돌아본다. 되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으니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다리를 위로 뻗는다.
저 위에, 다시 새로운 스승의 시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