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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젤 Apr 22. 2022

Box full of my favorite things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이길 거야

  대체로 나는 매사에 무덤덤한 편이지만, 가끔 심하게 우울에 잡아먹히는 순간이 있다.


 우울이라는 감정을 인지한 건 초등학생 저학년 때였다. 그땐 우리 부모님이 사이가 썩 좋지 않을 때였는데, 두 분이 싸우고 나면 집 안이 가라앉는 그 느낌이 너무 싫었다. 공기 중의 모든 수분이 축축 늘어져 내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두 분이 서로에게 수동적인 공격성을 비칠 때마다 나는 정말로 울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결혼에 대해 썩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건 그때의 부정적 경험이 크게 다가온 탓일지도 모른다.


 우울에 제대로 이름을 붙여 부르기 시작한 건 초등학생 고학년이 된 이후였다. 이러한 감정을 우울하다고 하는구나,라고 인지하기 시작한 때부터 우울은 나와 항상 함께했다. 동고동락한 시간만 따지자면 우울은 나의 제2의 가족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심한 우울감을 느낄 때면 나는 주로 도피하곤 했다. 잠시 그 감정을 잊을 수 있는 책이나 게임 속으로.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도피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더 이상 독서나 게임을 즐기지 못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럴 때는 그저 방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웠다가, 의미 없이 핸드폰을 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다 잠이 오면 자고, 배가 고픈 것 같으면 대충 편의점에 가서 끼니를 때우고. 성인이 되고 나선 우울을 달래려 몇 번 술병을 기울이기도 했다. 알코올에 절여진 뇌는 그나마 잠들기 쉬웠기 때문이다.


 항우울제를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건, 항우울제를 처방받아 먹은 지 3~4개월이 지난 때쯤이었다. 핑계 같지만 교대 근무를 하며 항우울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기는 쉽지 않았다. 좋은 일인지, 아닌지. 약이 나와 너무 잘 맞은 탓에 항우울제를 먹은 날과 먹지 않은 날이 너무 확연한 차이가 났다. 먹지 않는 날들이 지속되면 심한 우울이 찾아왔다. 그럴 땐 그냥 모든 걸 끝내고만 싶었다.


 이렇게 약 하나에 왔다 갔다 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내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약을 챙겼나? 언제 먹어야 하지?라고 매 번 고민하는 일도 신물이 났다. 또, 항우울제와 관련된 하나의 사건이 나로 하여금 빨리 약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지금 당장 수중에 있는 항우울제는 한 개밖에 남지 않았는데, 명절이 겹쳐 다음번 진료를 보기까진 일주일이란 시간을 더 버텨야 했다. 내겐 당장 내일 먹을 약이 절실했다. 지도 어플을 켜고 명절에 여는 정신건강의학과를 뒤져서 겨우 하나를 찾아냈다. 하지만 근무가 끝나고 찾아가니 창구 직원은 "저희는 예약하신 분만 진료해 드려요."라는 매정한 말로 나를 쫓아냈다.


 그 순간 화가 나며 동시에 억울함이 들었다. 나는 지금 당장 약이 없으면 내일, 모레를 버티기 힘든데, 그러면 날 먼저 봐줘야 하는 거 아닌가. 예약을 하는 환자만 받을 거면 지도 어플에 공지사항으로 ★예약자만 받습니다★라고 쓰던가, 아니면 영업시간을 띄우질 말던가. 집으로 돌아가며 괜히 돌멩이를 발로 찼다. 그리고 결심했다. 억울해서 내가 항우울제 끊고 만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한 번에 끊을 수 없듯 항우울제에 의존해서 살아가던 사람이 약을 한 번에 끊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단약 결심을 세우고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항우울제를 대체할 만한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의지만으로는 단약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게 필요했다. 내가 우울의 바다에 빠지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더라도, 어느 정도 발만 담그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우울할 때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자,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놀랐다. 생각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에. 병동에서는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러기엔 나란 사람이 생각보다 호불호가 명확했다. 어쩌면 그들이 보는 내 모습이 직장인으로서의 페르소나를 장착한 모습이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찾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대강 이렇다.


- Action: 피아노 치기, 음악 듣기, 읽고 싶은 책 읽기, 필라테스 하기, 웨이트 트레이닝 하기, 루미큐브 게임하기, 친한 친구나 동생과 이야기하기, 예쁘게 화장하기, 강렬한 색깔과 독특한 패턴의 옷 입기, 돈 쓰기, 맛있는 음식 먹기, 레시피 따라 뭔가 만들어 보기,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 이국적인 것-ex. 이집트 문화-과 관련된 박람회나 전시회 가기, 비 오는 날 카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거 감상하기, 푹 자기, 브런치에 헛소리 쓰기, 바다 보기


- Etc: 초콜릿, 허쉬 초코드링크, 무화과, 그릭요거트-꾸덕하고 시지 않은 거-, 피칸파이, 유명 아이스크림 체인점의 아몬드봉봉 아이스크림, 시나몬과 견과류가 들어간 빵, 좋아하는 디저트 집의 얼그레이 피칸 쿠키, 로제 떡볶이, 좋아하는 닭강정 집의 달콤강정, 콘 아이스크림, 깊고 낮은 마왕같은 목소리,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XY&Z 시리즈-, 디지몬 애니메이션-어드벤쳐&파워디지몬 시리즈-, 음악-락, 가요, 클래식, 뮤지컬 등-


 나는 여전히 우울에 종종 휩싸이곤 한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항우울제에 기대야만 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억해내곤 그걸 시도하려고 한다. 우울감이 느껴질 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 든 박스에서 하나를 꺼내본다. 그것이 나를 잠식하는 우울과 맞서는 무기이자 해결책이 돼줄 것을 안다. 사실, 이 글도 새벽 3시에 우울감을 느끼자마자 쓰기 시작했다.


 오늘의 내가 선택한 방법은 '브런치에 헛소리 쓰기'와 '푹 자기'다. 브런치에 이 글이 업로드되고 조금 시간이 지나 내가 잠에서 깼을 때, 나의 우울은 분명히 사라져 있을 것이다.


 내가 무언가에 느끼는 사랑―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주는 힘이 우울보다 더 강함을 이제는 안다. 그렇기에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우울 쯤이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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