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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by 최서희

나는 도시에 사는 처녀다.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단 몇 걸음도 걷기 어려운 복잡한 도시, 한적함이란 돈을 들여야만 겨우 누릴 수 있는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도시, 나는 그 도시에 사는 처녀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고, 책임져야 할 식솔도 없다. 생활에 불편함 없는 연봉과 거칠 것 없는 삶의 방식을 지닌 나를 사람들은 '골드미스'라고 부른다. 하지만 늦은 밤 불 꺼진 집에 들어서면 늘 외롭다. 자유롭고 풍족하다는 '골드미스'의 의미 속에 나는 외로움과 부족함을 느낀다.

새벽녘, 두두두두 내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깨 방 안을 서성이다 책장에서 연습장을 꺼낸다. 김용택 시인의 산문집 『雪』을 읽으며 흘려 쓴 낙서가 연습장 한 면을 채우고 있다.

'내게도 대문 없는 집이 있습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씩 웃으시는 두 노인네가 자고 먹고 웃고 숨 쉬는 그런 집이, 내게도 있습니다. 내게도, 돌아가 시를 쓰며 살고 싶은 집이 있습니다. 대문도 없이 나를 기다리는 그런 집이, 내게도, 있습니다.'

어렴풋이 떠오른다. 산문집을 다 읽고 나면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던 그때. 하지만 나는 바쁜 일상에 치여 서점에 가지 못했다. 도시의 삶은 늘 분주하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빴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분주하지 않되 속속들이 기억나는 나의 옛날, 가족과의 추억을 찾아간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속으로, 짧지만 소중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이 책은 박완서 작가의 어린 시절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그래서 이 책의 단어 하나하나에는 우리네 부족했지만 따뜻했던 기억이 서려 있다. 작가의 어머니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우리네 어머니와 다르지 않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억척스러운 사람, 그러나 자식 앞에서 자존심만큼은 버릴 수 없는 사람. 내 어머니의 모습이 책 속에서 고스란히 떠오른다.

우리 동네에도 싱아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삐비'라고 불렀다. 껌이 씹고 싶을 때면 언덕에 붙어 자란 삐비를 뽑아 껍질을 벗겨 씹곤 했다. 한참을 씹고 나면 정말 껌처럼 질겨지는 그것은 시골 아이들에게 꽤 근사한 간식이었다. 시골에는 장난감이 따로 없었고, 어디서든 놀이가 펼쳐졌다. 먹지 못하는 열매를 따서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귀부인 흉내를 내고, 채 자라지도 않은 마늘을 뽑아 흙에 버무려 반찬을 만드는 시늉을 하며 놀았다. 그러다 한 아이가 지루하다며 달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곧바로 담박질 선수가 되어 우리들만의 운동회를 열었다.

그렇게 책 속에는 내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나를 나 되게 한 곳, 그리고 그곳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었다. 들판을 뛰어다니다 보면 해가 지고, 친구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지만 나와 동생은 들판을 서성이곤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 "밥 먹으러 와라!" 엄마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집을 찾아갈 수 있는 나이였지만, 우리는 늘 엄마가 부르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 왜였을까? 엄마가 부르러 오는 게 좋아서, 엄마를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부러운 눈빛이 좋아서. 그것은 작가의 어머니가 어린 작가에게 스케이트를 목에 걸어주며 고향에 들어서게 했던 심리와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복하고 풍성했던 추억 속에는 늘 모자람이 서려 있다. 작가만큼은 아니었지만, 내 어린 시절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자람 속에서 더 큰 풍요로움을 배웠다. 홍시 두 개, 딸기 한 접시. 우리는 부족한 것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아버지 몫을 챙겨두고 남은 것을 나누다 보면, 큰언니는 작은언니를, 작은언니는 나를, 나는 동생을 생각하며 결국 배가 불러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배부를 수 있었던 건, 늘 배가 고팠을 엄마 때문이었다. 큰언니가 드린 것, 작은언니가 드린 것을 엄마는 다시 내 입에 넣어 주셨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북받쳐 오는 그리움에 눈물이 흐른다. 아버지가, 엄마가 보고 싶어 눈을 뜰 수가 없다. 눈을 뜨면 내가 속한 이 도시가 내가 떠나온 시골을 삼켜버릴 것만 같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그 많던, 지천에 널려 있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어느 순간 싱아는 어디에도 없다. 누가 다 먹었을까? 한참을 생각해 보니, 그건 아마도 나였던 것 같다.

대학에 진학해 멋진 여대생이 되기 위해 한 웅큼, 사회에 나와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 되기 위해 한 웅큼, 그렇게 한 웅큼씩 뽑아 먹다 보니 이제는 내 삶 어디에도 싱아는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삶에 길들여지는 동안 내 안의 싱아가 고갈되어 버린 것이다. 내 기억 속 싱아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책을 덮고 컴퓨터를 켠다. 이번 주말에는 잃어버린 싱아를 찾으러 시골에 가야겠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시골집에서 입을 옷을 챙기면서, 문득 어린 시절 씹어 먹던 싱아의 맹맹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한참을 서서 싱아의 맛을 음미하는 동안, 나는 비로소 잃어버린 싱아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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