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 자전거

by 최서희

긴 머리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가볍게 고개를 들고, 무심한 얼굴로 페달을 밟는데,

자전거 뒷바퀴에 여자의 생그러움이 묻어 반짝인다.

조정래의 『아리랑』 속 인물, 이동만.

새까만 머리에 빗물이 흐르듯 윤이 났고,

옷깃은 바람을 앞세워 스스로 날아올랐다.

자전거는 그에게 단순한 탈것이 아니었다.

고단한 땅을 밟지 않아도 되는 사람의 특권,

굽은 등을 펴고 고개를 치켜들 수 있는 도구.

누군가는 “재수 없다”고 혀를 찼지만,

그의 두 바퀴는 들판 위를 매끄럽게 가르며

거들먹거리며 지나갔다.

매국노라는 비루한 현실 위에서도 그의 페달질은 당당했다.

이동만과 대비되는 사람이 자전거에 실려온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곳.

물비린내가 햇살에 말라가던 그 어느 오후.

운동장,

커다란 자전거,

열두 살의 나, 열다섯 살의 언니.

언니는 말없이 아버지의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작은 손으로 묵직한 핸들을 붙잡고,

언덕을 올라 교문을 통과해 흙먼지가 이는 운동장 가장자리까지.

“자, 잡아. 핸들 꽉. 그래야 안 넘어진다.”

나는 자전거 위에서 줄곧 곤지발이었다.

페달은 멀었고, 균형은 어려웠다.

자전거는 자꾸 옆으로 기울었고,

나는 그럴 때마다 짧은 다리로 몸을 한껏 기울여 땅을 밟아야했다.

“괜찮아. 한 번쯤은 넘어져야 진짜 배우는 거야.”

언니의 말은 언제나 단호했고,

굳은 얼굴은 그 말이 참말이란 믿음을 실어줬다.

나는 다시 일어났고,

다시 올라탔다.

자전거는 점점 덜 흔들렸고,

바퀴는 부드럽게 굴렀고,

바람은 내 얼굴을 긁으며 지나갔다.

며칠이 지났을까, 나는 처음으로

두 다리로 세상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은 겁났고,

조금은 신이 났고,

그보다 더 크게, 이상하게 벅찼다.

언니는 그 해 겨울, 집을 떠났다.

언니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도시로 나갔고,

나는 거기 남았다.

운동장 가장자리,

언니와 함께 했던 길을 이제는 혼자 자전거를 타고 마냥 돌았다.

자전거 타기 연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씻을라치면

언니 손바닥은 죄다 까여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기우뚱거릴 때마다 균형을 맞추느라 자전거를 얼마나 잡아끌었을까.

까진 무릎에 엄살을 더하느라 언니 손은 보지 못했다.

언니가 왜 그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나왔는지.

내 무릎이 까질 때마다 왜 그렇게 흐뭇하게 웃었는지.

왜 바퀴가 앞으로 나아가면,

뛰던 발걸음을 멈추고 멀찍이 떨어졌는지.

공원에서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들을 보면

나는 여전히 아이의 뒤를 본다.

누군가가,

어쩌면 아주 조용히,

쟁쟁걸음으로 달리며 받쳐주고 있을까.

자전거는 그런 것이었다.

앞으로 곧게 나아갈 때는

누군가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살갗이 벗겨지고 있음을 모르다가

자전거가 이리저리 흔들리다 불안감에 넘어질 때면

자전거를 놓고 있는 손에 원망만 쏟아붓는 거.

그 지루한 과정을 거쳐

어느 순간

혼자 달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모든 공을 자전거 위의 자신에게 두는 것.

그게 어쩌면,

언니와 동생

아버지와 아들

엄마와 딸

이들의 관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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