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잘 날 없는 나무

by 최서희

따닥따닥따닥따닥—
나무 마루에 앉아 토방으로 떨어지던 빗소리를 들으며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시절이 있었다.
비 오는 날은 농사꾼의 아내에게는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귀한 휴식이었고,
농사꾼의 딸에게는 엄마와 마주 누워
뒹굴뒹굴, 그 넉넉한 품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날이었다.

우리 엄마, 은주는 송산에서 손꼽히는 이야기꾼이다.
무심한 말도 엄마의 입에 들어가면
금세 맛깔나고 살아 숨 쉬는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다.

가끔, 아주 가끔
엄마의 소녀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아빠가 괜스레 미웠다.
수줍고 여리며 귀하게 자란 단발머리 소녀를
뽀글 머리 촌스런 아줌마로 만든 장본인이
아빠 같아, 괜히 눈을 찌푸려보곤 했다.

그런데, 참 간사하지.
월남전에서 찍은 아빠 사진을 보면
이번엔 마음이 또 짠해진다.

훤칠한 키,
드넓게 벌어진 어깨,
오뚝한 콧날에 깊은 눈매,
우리 아빠 뼈는 용가리 통뼈라
누가 봐도 장군감이라던 그 용감한 청년.
사진 속 아빠는 정말, 배우처럼 멋졌다.
정말 근사했다.

정영민, 박은주.
아가씨 시절엔 “영민 씨”, “은주 씨” 하며
애교 부리던 막내딸이었는데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귀하고 어린것 같던 그 막내가
이젠 늙은 부모의 바람 잘 날 없는 나뭇가지가 되어 있다.

나는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나 이리 좋은데,
우리 부모님도 내 엄마, 아빠가 되어
기쁘셨을까나, 행복하셨을까나?

철없던 그 옛날,
“천억을 준다면 나랑 바꿀 거야?” 하고 물었더니
“택도 없다”라고 단번에 잘라 말하시던 것을 보면
좋으셨던 것 같기도 하고,
매번 내가 내려갈 때마다
“하루만 더 있다 가라”며 잡으시던 손을 생각하면
부모님도 내 엄마, 아빠여서 좋으셨던 거겠지?
그러신 거겠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두 발 자전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