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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시계

by 최서희

저놈의 시간은 또 지구 반 바퀴만큼 뒤처져 흐르고 있다. 제 역할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이 느릿하게 걸어오는 모습이라니. 보는 이로 하여금 머리라도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비 소리에 깨어,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문득 저놈과 눈이 마주쳤다. 높은 곳에서 나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저놈이 괜히 못마땅해서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지구 반 바퀴만큼 억지로 끌고 와서는 한마디 던졌다.

"힝~ 너 같으면 옛날에 곤장 100대 감이야. 뭐가 불만인데? 혼자 그렇게 뒤처져서 걸어오면 좋냐? 바보, 멍청이. 봐라, 세상은 먹이를 사냥하는 사자처럼 앞만 보고 뛰어가는데, 넌 왜 이 모양이냐?"

구박을 해도 저놈은 여전히 같은 속도, 같은 간격으로 돌기만 한다. 내 두고 볼 거다. 또 지구 반 바퀴만큼 뒤처져 있기만 해라. 이번엔 아주 분해해 버릴 테니.

새벽에 깼던 것이 화근이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되어 돌아와 보니, 저놈은 어김없이 또 저만큼 뒤처져 있다. 멍청이. 기회를 줘도 고마워할 줄을 모르고, 변할 생각도 없구만.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저놈은 어느새 예전 그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지구 반 바퀴만큼 뒤처진 시간.

그런데 문득, 저놈의 시간이 어제가 아니라 내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놈은 지구 반 바퀴만큼 앞서 살고 있는 것인가? 이런, 그래서 그렇게 잘난 척하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던 거구나. 그렇다 해도, 어쨌든 넌 고장난 인생이야.

괜히 하루의 피로를 저놈한테 화풀이하고선 새 건전지를 찾다가,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을 읽고 끄적였던 낙서를 발견했다.

"윤동주님의 자화상을 읽고 순간 내 모습은 어떨지 우물 속의 내 모습도 그리 밉고 안쓰럽고 또, 그립고 할런지

우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우물 속의 나는 항상 급하고 어지럽고 불안한 모습이다 먼저 뛰려고 하고 먼저 잡으려고 하니 그 꼴이 참 우습기도 하다 그러다 넘어지면 일어날 줄도 모른다 한참을 땅바닥에 코를 박고 고개를 못 드니 넘어진 시간만큼 뒤처진 내 모습이 싫어서 일테지 그러니 우물 속의 내 모습도 밉고 안쓰럽고 또 그립겠지

가끔은 지구가 너무 빨리 돌아 어지러울 때가 있다 세상의 축이 되지 못하고 주위만 뱅뱅 돌고 있으니 지구가 날뛰는 순간, 흔들릴 수밖에

지금도 나는 너무 어지러워, 머리가 아프다"

문득, 저놈의 여유가 부러웠다. 내가 아무리 화를 내고 다그쳐도 저놈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 역할도 못 하는 멍청이로 보인다 해도, 저놈은 흔들리거나 방황이라는 이름으로 쉬는 법이 없다. 어쩌면 저놈에게 쉼은 곧 죽음일지도 모른다. 움직이는 순간이 매 순간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빨리 달리나, 뒤처져 달리나, 앞서 달리나, 그것은 단지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의 차이일 뿐이다.

세상에 매여 사느냐, 세상을 가르며 사느냐. 5도만 눈을 들어도 내가 뛸 수 있는 세상은 훨씬 넓다. 그런데 나는 매일 우중충한 땅바닥만 보고 걸으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축 처진 모습일 수밖에.

새 건전지를 끼우려다 말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너는 네 세상에서 살아라. 내 사는 곳에도 너 같은 멍청한 시간 하나쯤은 있어야지.'

하는 맘에 그냥 저놈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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