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기러기

by 최서희

사랑에 빠졌단다. 참 예쁘기만 한 친구는 사랑에 빠졌다며 한 시간이 넘도록 재잘거리고 있다. 안 그래도 희고 고운 얼굴빛이 상기되어 금방이라도 연지곤지 찍고 가마에 올라야 할 새색시 같다.

'참, 곱구나. 사랑하는 이는 모두 저리 아름답고 고울래나.'

흥분을 어찌하지 못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 사람의 얼굴을 애써 설명하려 한다. 나는 또 애써 방금 전에 본 것마냥 알 것 같다며 맞장구를 친다. 친구는 내게 자랑이 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드디어 사랑에 빠졌어'라고. 그리고 나는 축하해 주고 싶은 것이다. '너와 참 잘 어울려'라고.

저 친구는 지금 다 식은 커피 잔을 쉴 새 없이 저어대고 있다.

"아픈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어. 어찌해야 하니?"

눈물을 글썽거리는 친구가 지금 내 앞에 있다. 나는 외우고 있던 "백치애인"을 읊어 준다.

"나에게는 백치애인이 있다. 그 바보의 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아프게 하는지 모른다. 아, 아니다.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슬프게, 아프게, 슬프게, 아프게..."

"잠깐, 쉬어봐. 잠깐이면 돼."

친구는 눈물을 멈추고 카페 문을 나선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나는 그렇게 10분을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 친구는 편지지를 들고 나타난다. 이제 다시 읊으라고 한다. 처음부터.

나는 다시 "백치애인"을 읊기 시작한다.

"나에게는 백치애인이 있다. 그 바보의 됨됨이가, 됨됨이가, 됨됨이가... 아, 미안. 그 바보의 됨됨이가 나를 얼마나 아프게, 아프게, 아니 미안. 그 바보의 됨됨이가 나를 얼마나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벌써 1년 전이네. 너한테 미안해서 차마 말 못 했지만, 나 그 편지 그냥 버렸어. 지나가던 길에 눈에 들어오는 아무 집, 우유 보자기에 넣어버렸어. 너무 불쌍해서. 내가 너무 불쌍하더라. 우표를 사고 풀칠해서 편지지에 붙이고, 우체통에 넣을 내 모습을 생각하니 너무 불쌍했어. 그래서 멋지게 뒤돌아줬어. 그랬더니 이렇게 완벽한 사랑에 빠지게 되었잖니."

'완벽한, 완벽한...'

정말 저 친구가 사랑에 빠지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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